본문 바로가기
세계의 시인들

예이츠 W. B. Yeats, 『예이츠 서정시 전집 제3권 상상력』: 내전 시기의 명상들 편에서.

by 시 박스 2024. 10. 6.
728x90

 

 

내전 시기의 명상들

 

조상 전래의 저택들

 

 

  어느 부유한 사람의 잘 가꾼 언덕들의 나무들이

  살랑거리는 한가운데의, 꽃  피는 잔디밭 사이에는

  야심찬 고통 없이도 생명력이 넘쳐난다.

  그리고 생명력은 푹푹 쏟아져 분수대에 넘치고,

  쏟아지면 쏟아질수록 더 아슬아슬하게 솟구친다.

  어떤 형태로든 제 마음대로 선택하고,

  타인의 명령에 결코 기계적으로나 굴종된 모습으로

  몸을 숙이지 않으려는 것처럼.

 

  꿈일 뿐, 꿈이로다! 하지만 풍요롭게 번쩍이는 분출이

  삶 자체의 희열에서 솟아나온다는 사실이

  꿈보다 훨씬 더 확실하다는 걸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호메로스는 노래하지 않았으리라.

  비록 지금은, 샘물이 아니라, 풍성한 조수의

  미지의 암흑에서 튕겨 나온,

  어떤 놀라운 속 빈 조개껍데기가 부유한 계층의

  상속된 영광의 그림자를 상징하는 듯 보이지만.

 

  어느 격렬하고 비통했던 양반, 강직했던 어떤 분이

  건축가와 예술가를 불러들여,

  똑같이 비통하고 격렬했던 그들이

  돌에다가 모두가 밤낮으로 동경했던 아름다움을,

  아무도 몰랐던 우아함을 배양하게 했던 것.

  하지만 주인이 죽어 매장되면 생쥐들이 날뛸 수 있고,

  그 집 증손자는 청동과 대리석 작품에도 불구하고,

  생쥐에 지나지 않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오, 만약 오래된 테라스 위로 공작새가

  곱상한 발로 서성대는 정원들이,

  혹은 무관심한 정원의 신들 앞에

  유노가 도자기 단지로부터 보여 주는 모든 것이,

  오, 슬리퍼 신은 '지체 높은 분'이 편안함을 발견하고,

  '유년시절' 모든 감성의 즐거움을 발견하는

  평평하게 조성된 잔디밭과 자갈길이, 우리의 폭력과 더불어

  우리의 위대함을 오로지 차지하기만 한들 어쩌겠느냐?

 

  만약 가문(家紋)을 새겨놓은 문들의 영광과

  보다 고답적이었던 시대가 설계한 건물들이,

  우리 조상의 유명한 초상화들이 줄지어 전시된

  넓은 방과 긴 회랑들의 광택 나는 바닥 위를 거니는 일이,

  만약 인류의 가장 위대한 사람이 무엇보다 크게

  찬미하거나 축복하려고 생각하는 그런 것들이,

  우리의 비통한 심정과 더불어 우리의 위대함을

  오로지 차지하기만 한들 어쩌겠느냐?

 

 

우리 집

 

 

  오래된 다리,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된 탑,

  돌담으로 둘러싸인 농가 한 채,

  한 에이커 넓이의 돌 많은 땅,

  거기에는 상징적인 장미가 꽃을 터뜨릴 수 있는 곳,

  울퉁불퉁한 늙은 느릅나무들, 수없이 많은 산사나무들,

  비 오는 소리, 혹은

  불어오는 온갖 바람소리.

  열두 마리 암소들의 물벼락에 겁을 먹고

  다시 냇물을 가로지르는

  긴 다리 도요새.

 

  나선형 계단, 석조 아치의 침실,

  아궁이의 넓은 회색 돌 벽난로,

  촛불과 글이 적힌 페이지.

  '명상하는 사람'의 플라톤주의자가

  어떻게 신들린 열정이

  모든 걸 상상했던가를 추적하면서

  이런 방에서 줄곧 노력했다.

  시장과 축제에서 돌아오는

  갈 길 저문 나그네들이

  한밤중 촛불이 번득이는 걸 보아 왔다.

 

  두 사람이 이 자리에 터전을 잡았다.

  중기병(重騎兵) 한 사람이 이십 명의 기병을 끌어모아

  이 어지러운 지점에서 일생을 보냈다.

  여기서 긴 전쟁들과 야간 기습 공격으로

  줄어든 병사들과 그는

  잊고 잊힌 무뢰한이 된 것 같았다.

  그런데 나로서는, 내가 죽은 뒤에

  내  육신의 상속자들이

  역경에 적합한 표상을 발견하여

  고독한 마음을 찬미하도록 빈다.

 

 

내 탁자

 

 

  두 개의 묵직한 구각(溝脚)과 널빤지,

  거기에 사토의 선물인, 변하지 않는 장검(長劍)이

  펜과 종이 옆에 놓여 있다,

  나의 하루하루가 목적 없이

  허송되지 않도록 막아 주려고,

  수놓아 장식한 비단이

  목제 칼집을 싸고 있다.

  그것이 만들어졌을 때는

  초서가 태어나기 전이었다.

  그것은 휘어진 초승달마냥 달빛들 발하며,

  사토 가문에서 오백 년간 보관되어 있었다.

  하지만 변화가 없다면 달이 없는 법.

  오직 쓰라린 가슴만이

  불변의 예술품을 잉태한다.

  우리의 학식 있는 분들이 주장하기를

  그림이나 도자기의 경이로운 성취들은

  그것이 제조된 때에,

  그리고 그 장소에서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전해지고,

  수백 년간 내려와도

  그 칼처럼 변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영혼의 아름다움은 가장 칭송받는 것이니,

  사람들과 그들이 하는 일은

  그 영혼의 불변의 모습을 띠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가장 부유한 상속자라도,

  열등한 예술을 사랑하는 자는 아무도

  천국의 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비록 비단 옷을 입고 의젓하게 산책을 한다는

  시골 사람들의 한담이 있다 하더라도,

  깨어 있는 정신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그런 고통스런 가슴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유노의 공작새가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 "공작새가 비명을 지르는" 것은 전통주의자들에게는 역사적인 격변을 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내 후손들

 

 

  조상에게서 활기 넘치는 정신을 상속받았으니,

  나는 꿈을 키우고 딸과 아들에게

  그와 같은 활기찬 마음을 남겨 주어야 한다.

  그렇지만 현실적인 삶은

  바람에게 좀처럼 향기를 뿌려줄 수 없고,

  아침 햇살에다 좀처럼 영광을 펼쳐 보일 수 없다.

  대신 찢어진 꽃잎들이 정원에 흩어지고,

  그다음엔 흔한 초록이 잔뜩 차지할 뿐이다.

 

  헌데 만약 내 후손이 영혼의 자연적인 쇠퇴로 인하여,

  시간만 소비하는 일에 너무 많이 매달림으로 인하여,

  과도한 놀이나 바보와의 결혼으로 인하여, 

  그 꽃을 잃어버리면 어찌할 것인가?

  오르기 힘든 이 계단과 견고한 이 탑이

  지붕 없는 폐허가 되어,

  갈라진 돌 사이에 부엉새가 집을 짓고,

  황량한 하늘에 구슬픈 울음을 터뜨릴지 모르리.

 

  우리를 만들어낸 우주의 '원동력'이

  바로 그 부엉새들을 빙빙 돌게 하는 것.

  그리고 나는, 오랜 이웃의 우정이 이 집을 선택해 주었고,

  한 여인의 사랑을 위해 이 집을 장식하고 개조해 주었으니,

  사랑과 우정은 충분하다고 여기면서

  나 자신이 아주 잘 풀렸다고 생각하고,

  무엇이 번성하고 무엇이 기울어지든

  이 돌들은 그들과 나의 기념물로 남는다고 믿는다.

 

 

내 집 앞의 길

 

 

  한 상냥한 반정부 병사,

  몸집 큰 폴스타프 장군 같은 사람이

  마치 총에 맞아 죽는 것이

  태양 아래 가장 멋진 놀이인 것처럼

  농담 삼아 내전을 떠벌리고 온다.

 

  갈색의 상관과 그의 부하들,

  정부군 군복을 반쯤 걸치고 내 문간에 선다.

  그리고 나는 궂은 날씨,

  싸락눈과 비에 대해 투덜거리고,

  폭풍에 부러진 배나무 얘기를 한다.

 

  나는 마음속 부러움을 잠재우기 위해서

  냇물 위에서 쇠물닭이 이끌고 가는

  깃털 달린 그을음 뭉치 같은 것들을 세어 본다.

  그러고는 차가운 눈 같은 꿈에 점령된

  내 침실로 발길을 돌린다.*

 

* "차가운 눈 같은 꿈"은 화자가 점점 자신의 꿈같은 세계에 염증을 느끼는 것의 은유이다.

꿈이 창조력을 상실하고 있음을 말한다. 3연의 4-5행은 시인의 절망적인 자화상이다.

 

 

예이츠: 1865-1939. 아이랜드의 시인이자 극작가. 선조가 아일랜드에 정착한 영국인이어서 혈통으로나 종교적으로 아일랜드 토박이는 아니었으나, 아일랜드의 신화와 전설, 신비주의에 매료되어 작품 활동을 벌였다.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의 문예부흥과 독립에도 공헌하였다. 그는 자신의 시에 개인적인 경험을 표출하면서도, 그 안에서 설화적 주제나 상징들을 자신의 의도에 맞게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192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