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 공모 수상작품

제24회 창비신인시인상 수상작: 「때맞춰 」외 4편(김진선 시인)

by 시 박스 2024. 11. 14.
728x90

때맞춰

 

  당신은 곧 도착한다며 어디라도 들어가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플랫폼에 앉아 몇번의 지하철을 보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 중이었

습니다 잘못 내린 것인지 다음 지하철을 타고 그새 떠난 사람도 있었습니다

 

  편의점 까페 중고서점 옷가게

  역 근처에는 기다릴 곳이 많았지만 어디에도 갈 수 없습니다

  시간을 때울 곳이 많은 게 난처했습니다

 

 

  내가 사는 곳에서는 오월이면 도로를 통제하고 사람들이 모입니다 어디

에 들어가지 않고서도 사람들은 기다립니다 있었던 사람들을 있을 사람들

을 위해서

 

  노래는 계속 불리고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방향으로 걷다보면

  발아래 차선이 가야 할 곳을 알려주는 것 같고

 

  당신과의 약속에 늦을까봐 걸음을 서둘렀습니다 한 사람이 덥석 내 손을

잡았을 때

 

  우리는 앞을 보고 걸읍시다 뒤따라오는 사람들도 함께 나설 겁니다 믿게

되는 목소리 들렸고 처음 걸음마를 배운 아이처럼 실천하는 마음이 생긴 것

이었습니다

 

  택시를 타고 지나갈 땐 순식간이라 몰랐던 것이었습니다 이 길에서 뒤돌

아보는 일은 누구의 몫이었을까요

 

  과거로부터 도착한 질문이 기다리고 있는 곳에서

 

  동시에 흔들리는 나무의 움직임은 커다란

  슬픔의 크기와 비례하듯

  울지 않아도 우는 것 같았습니다

 

  어디라도 들어가서 기다리라는 말은 무사하라는 의미였을까요

  오래된 함성 속에서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서

 

  눈을 감고도 훤한 곳에서

  다른 길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길 위의 사람들뿐이었으며

 

  그게 아니라면

 

  어째서 빛을 가둘 수 없는 것이었는지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묻고 싶은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을 때

 

  문득 궁금해진 것입니다

 

  기다림은 자세에 가까운 것이지 감정에 가까운 것인지

 

  내가 사는 곳에서는 오월이면 도로를 통제하고 사람들이 모입니다 도로

는 거리가 되고 거리 끝 광장에서 사람들은 이제 오월이 아니더라도 모입

니다

 

  미래에 대해 말하면 미래가 자기 이야기를 하는 줄 알고 찾아오지 않을까

봐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몇가지는 더 있습니다 들켜도 충분한 밤

의 광장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하겠지요

 

  어디쯤 오고 있어?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조금 떨렸는데

 

  광장의 시계탑은 어떤 기대 속에 놓인 걸까 생각하며 분수대 물줄기 바

라본 것인데 눈부신 걸음들이 때맞춰 미래의 이야기로 향하고 있었던 것입

니다

 

  아무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  >

 

 

아무는 동안

 

 

  바람이 유독 심한 날에는

  찾아오는 사람 없다고 했다

  길을 걷다가 보이는 돌

  위에 놓인 돌

  바람 위에 놓인 누군가의 바람 같은 거

  몇해 전 갔던 절은 불이 나고

  승려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산을 내려왔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서

  비탈길을 천천히

  걷다가 보이는 돌

  망가진 걸 내밀어도 웃을 수 있다면

  손에 쥐고 가장 멀리 던진 돌이 있다

  물속 가라앉은 돌

  이끼가 시간을 덮고 뭉갤 때

  돌은 연약한 것

  잃어버린 적 없는 것

  돌의 손 잡고

  신중하게 소원 비는 사람

  잡은 손 놓으면 먼저 흔들리는 사람

  앞에 돌

  아름답게 무너질 줄 모르는 것

  생각하다가

  아프기만 했다

  돌끼리 부딪치는 소리

  간밤에 쏟아지던 기척 같아서

  더 아프다고 했다

  <  >

 

 

이야기의 신

 

 

  기도할 땐 감긴 눈 속은 아무도 모르는 거야 대신 밝힌 초 앞에 앉아 굳어

가는 촛농 모양 보면 길흉 정도는 알 수 있더라

 

  집 얻어 나간 이모가 몇달이 지나 일러준 것들

 

  말 뒤에 늘 알 수 있다

  보인다 하면서

 

  처음 보는 이들의 사정을 들어주고 있을 때

 

  신이 있는 거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겨울 눈처럼 새하얀 토끼가 굶어 죽어 태어난 게 나라고 이모의 입을 빌

려 이모의 신이 한 말

  내가 태어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게 신이라니

 

  이모가 하는 말은 이모의 음성으로 들리다가도 이모의 서사만은 아니었

는데 그 순간 믿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이었을까

 

  깃드는 것으로

 

  다 안다

  보고 듣고 계신다

 

  그때 이모는 말을 많이 했는데

  쌓이고 쌓이는 눈과

 

  이모와 신

 

  두려움은 소리도 없이 자라나 유일해지고

  우리의 생활을 가지며 깊어가는

 

  기계음 울리는 중환자실에 누워 이모는 이모의 신을 떠올렸을까 혼자된

신 몇번의 삶 물끄러미

 

  믿는다는 의식 없이 믿었나

 

  이모의 신은 이모를 지켜주었나

  이모가 모시던 신은 어디로 갔으려나

  그런 게 궁금해서

 

  이모는 신이 되었다

  언제 신이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이렇게 쓰지만

 

  아무래도 세상 사람의 수만큼

  신의 세상도 있는 거라면

 

  이제는 내가 이야기를 지어낼 차례인 것 같아서

  <  >

 

 

 

낭독회에서

 

 

                                                                 내 책들은 읽히기 위해, 그리고 낭독되기 위해 이루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것들을 이야기들이라 부른다. *

 

 

 

    인사를 나누지 않는 사람들과

    마이크가 켜지면 자세를 고쳐 앉는 사람들과

 

    반갑습니다

 

    저는 이런 자리와 서먹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낯선 사람들인가요 한번쯤

은 마주친 적 있을 법한 차림으로 계신가요 우리는 만납니다

 

                                                             

                                                       *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세어본다

 

    하나, 둘

 

    성급하게도 당신은

    이미 속으로 셋을 세었겠지만

    사랑에 관해서는 언제나

    하나만 있다고 말하는 게 맞다

 

    이 시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아야 할 텐데

 

    지겹게도

    이미 걸어오고 있는 사람

 

    쓰러진 러버 콘을 바로 세우며

    주인이 버린 개가 흐느끼는 소리 들었다

 

    어떤 방은 밤새 불이 꺼지지 않는구나

   누군가 불을 끄면 밤은 두번 찾아오지만

    딱 한번만 시작될 수 있는 아침과

 

    "거기 있었구나"

 

    시인이 말했다

 

    쓰진 않았다

 

    서툴게도 이름은

    사람과 사람의 마음에 지나지 않는 것

    이미 개에게는 이름이 있었고

    구체적인 마음도

 

    방향을 가지면서 하나, 둘 살았다

 

    잘 살았다

 

 

                                                          *

 

    시간이 걸렸습니다 쓰지 않은 시보다 내가 오래 살아남을까봐 나만 혼자

남았을까봐 조심스럽게 눈을 뜨고 사람은 유독 새벽에 더 아프지 사람 아닌

것도 더 아플까 궁금하다가

 

    하나와 둘과

 

    미처 세지 못한 셋을 생각하면서

    안부를 전합니다

 

    우리는 이야기가 필요해서 여기에 모였던 겁니다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  >

 

 

 

목격담

 

 

  지켜만 본 것

  불타고 있는 산

  타는 것은 쉽게 무너진다

  무너지는 것 지켜보다가

  문득 발 딛고

  서 있는 만큼의 땅이

  땅의 전부이기도 하겠다

  놀랍게도 자신이 가진 전부에서

  척척 나아가는 것

  한 노인은

  몇걸음 내딛고

  다시 뒷걸음질 치는 식으로

  일생을 걷다가

  멈출 때를 알기도 할 텐데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폈더니

  움직이는 해안선으로부터

  달아나는 사람들뿐이라고

  몇번이고 파도가 거세게 치면

  몆번인가 되돌아오는 세월이 있어서

  다시 지켜본 것

   멈춰 있는 것 움직인다면

  움직이는 것 멈춘다면

  그게 전부라면

  일생을 살아서는 안 될 것만 같은데

  무엇이 나를 이렇게

  오랜 구경 속에 남겨두는지

  <  >

 

 

 

수상작: 김진선 때맞춰  4

수상자 약력: 1991년 부산 출생.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수료.

심사위원: 김현 박소란 주민현(이상 시인) 오연경(문학평론가)

 

선정 이유: 때맞춰  4편은 최근의 시적 경향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채롭고 유려하게 펼쳐내는 점이 눈에 띄었다. 긴 호흡의 시에서는 긴 문장과 짧은 문장을 변주하는 구성력이 뛰어났고 짧은 호흡의 시에서는 리듬감있게 언어를 밀고 가는 힘이 느껴졌다. 응모작들의 편차가 적고 이미 완성도있는 시세계를 갖추었다는 점에서 자신만의 화법과 감각을 단련해온 시간을 엿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