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맞춰
당신은 곧 도착한다며 어디라도 들어가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플랫폼에 앉아 몇번의 지하철을 보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 중이었
습니다 잘못 내린 것인지 다음 지하철을 타고 그새 떠난 사람도 있었습니다
편의점 까페 중고서점 옷가게
역 근처에는 기다릴 곳이 많았지만 어디에도 갈 수 없습니다
시간을 때울 곳이 많은 게 난처했습니다
내가 사는 곳에서는 오월이면 도로를 통제하고 사람들이 모입니다 어디
에 들어가지 않고서도 사람들은 기다립니다 있었던 사람들을 있을 사람들
을 위해서
노래는 계속 불리고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방향으로 걷다보면
발아래 차선이 가야 할 곳을 알려주는 것 같고
당신과의 약속에 늦을까봐 걸음을 서둘렀습니다 한 사람이 덥석 내 손을
잡았을 때
우리는 앞을 보고 걸읍시다 뒤따라오는 사람들도 함께 나설 겁니다 믿게
되는 목소리 들렸고 처음 걸음마를 배운 아이처럼 실천하는 마음이 생긴 것
이었습니다
택시를 타고 지나갈 땐 순식간이라 몰랐던 것이었습니다 이 길에서 뒤돌
아보는 일은 누구의 몫이었을까요
과거로부터 도착한 질문이 기다리고 있는 곳에서
동시에 흔들리는 나무의 움직임은 커다란
슬픔의 크기와 비례하듯
울지 않아도 우는 것 같았습니다
어디라도 들어가서 기다리라는 말은 무사하라는 의미였을까요
오래된 함성 속에서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서
눈을 감고도 훤한 곳에서
다른 길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길 위의 사람들뿐이었으며
그게 아니라면
어째서 빛을 가둘 수 없는 것이었는지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묻고 싶은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을 때
문득 궁금해진 것입니다
기다림은 자세에 가까운 것이지 감정에 가까운 것인지
내가 사는 곳에서는 오월이면 도로를 통제하고 사람들이 모입니다 도로
는 거리가 되고 거리 끝 광장에서 사람들은 이제 오월이 아니더라도 모입
니다
미래에 대해 말하면 미래가 자기 이야기를 하는 줄 알고 찾아오지 않을까
봐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몇가지는 더 있습니다 들켜도 충분한 밤
의 광장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하겠지요
어디쯤 오고 있어?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조금 떨렸는데
광장의 시계탑은 어떤 기대 속에 놓인 걸까 생각하며 분수대 물줄기 바
라본 것인데 눈부신 걸음들이 때맞춰 미래의 이야기로 향하고 있었던 것입
니다
아무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 >
아무는 동안
바람이 유독 심한 날에는
찾아오는 사람 없다고 했다
길을 걷다가 보이는 돌
위에 놓인 돌
바람 위에 놓인 누군가의 바람 같은 거
몇해 전 갔던 절은 불이 나고
승려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산을 내려왔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서
비탈길을 천천히
걷다가 보이는 돌
망가진 걸 내밀어도 웃을 수 있다면
손에 쥐고 가장 멀리 던진 돌이 있다
물속 가라앉은 돌
이끼가 시간을 덮고 뭉갤 때
돌은 연약한 것
잃어버린 적 없는 것
돌의 손 잡고
신중하게 소원 비는 사람
잡은 손 놓으면 먼저 흔들리는 사람
앞에 돌
아름답게 무너질 줄 모르는 것
생각하다가
아프기만 했다
돌끼리 부딪치는 소리
간밤에 쏟아지던 기척 같아서
더 아프다고 했다
< >
이야기의 신
기도할 땐 감긴 눈 속은 아무도 모르는 거야 대신 밝힌 초 앞에 앉아 굳어
가는 촛농 모양 보면 길흉 정도는 알 수 있더라
집 얻어 나간 이모가 몇달이 지나 일러준 것들
말 뒤에 늘 알 수 있다
보인다 하면서
처음 보는 이들의 사정을 들어주고 있을 때
신이 있는 거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겨울 눈처럼 새하얀 토끼가 굶어 죽어 태어난 게 나라고 이모의 입을 빌
려 이모의 신이 한 말
내가 태어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게 신이라니
이모가 하는 말은 이모의 음성으로 들리다가도 이모의 서사만은 아니었
는데 그 순간 믿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이었을까
깃드는 것으로
다 안다
보고 듣고 계신다
그때 이모는 말을 많이 했는데
쌓이고 쌓이는 눈과
이모와 신
두려움은 소리도 없이 자라나 유일해지고
우리의 생활을 가지며 깊어가는
기계음 울리는 중환자실에 누워 이모는 이모의 신을 떠올렸을까 혼자된
신 몇번의 삶 물끄러미
믿는다는 의식 없이 믿었나
이모의 신은 이모를 지켜주었나
이모가 모시던 신은 어디로 갔으려나
그런 게 궁금해서
이모는 신이 되었다
언제 신이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이렇게 쓰지만
아무래도 세상 사람의 수만큼
신의 세상도 있는 거라면
이제는 내가 이야기를 지어낼 차례인 것 같아서
< >
낭독회에서
내 책들은 읽히기 위해, 그리고 낭독되기 위해 이루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것들을 이야기들이라 부른다. *
인사를 나누지 않는 사람들과
마이크가 켜지면 자세를 고쳐 앉는 사람들과
반갑습니다
저는 이런 자리와 서먹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낯선 사람들인가요 한번쯤
은 마주친 적 있을 법한 차림으로 계신가요 우리는 만납니다
*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세어본다
하나, 둘
성급하게도 당신은
이미 속으로 셋을 세었겠지만
사랑에 관해서는 언제나
하나만 있다고 말하는 게 맞다
이 시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아야 할 텐데
지겹게도
이미 걸어오고 있는 사람
쓰러진 러버 콘을 바로 세우며
주인이 버린 개가 흐느끼는 소리 들었다
어떤 방은 밤새 불이 꺼지지 않는구나
누군가 불을 끄면 밤은 두번 찾아오지만
딱 한번만 시작될 수 있는 아침과
"거기 있었구나"
시인이 말했다
쓰진 않았다
서툴게도 이름은
사람과 사람의 마음에 지나지 않는 것
이미 개에게는 이름이 있었고
구체적인 마음도
방향을 가지면서 하나, 둘 살았다
잘 살았다
*
시간이 걸렸습니다 쓰지 않은 시보다 내가 오래 살아남을까봐 나만 혼자
남았을까봐 조심스럽게 눈을 뜨고 사람은 유독 새벽에 더 아프지 사람 아닌
것도 더 아플까 궁금하다가
하나와 둘과
미처 세지 못한 셋을 생각하면서
안부를 전합니다
우리는 이야기가 필요해서 여기에 모였던 겁니다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 >
목격담
지켜만 본 것
불타고 있는 산
타는 것은 쉽게 무너진다
무너지는 것 지켜보다가
문득 발 딛고
서 있는 만큼의 땅이
땅의 전부이기도 하겠다
놀랍게도 자신이 가진 전부에서
척척 나아가는 것
한 노인은
몇걸음 내딛고
다시 뒷걸음질 치는 식으로
일생을 걷다가
멈출 때를 알기도 할 텐데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폈더니
움직이는 해안선으로부터
달아나는 사람들뿐이라고
몇번이고 파도가 거세게 치면
몆번인가 되돌아오는 세월이 있어서
다시 지켜본 것
멈춰 있는 것 움직인다면
움직이는 것 멈춘다면
그게 전부라면
일생을 살아서는 안 될 것만 같은데
무엇이 나를 이렇게
오랜 구경 속에 남겨두는지
< >
수상작: 김진선 「때맞춰」 외 4편
수상자 약력: 1991년 부산 출생.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수료.
심사위원: 김현 박소란 주민현(이상 시인) 오연경(문학평론가)
선정 이유: 「때맞춰」 외 4편은 최근의 시적 경향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채롭고 유려하게 펼쳐내는 점이 눈에 띄었다. 긴 호흡의 시에서는 긴 문장과 짧은 문장을 변주하는 구성력이 뛰어났고 짧은 호흡의 시에서는 리듬감있게 언어를 밀고 가는 힘이 느껴졌다. 응모작들의 편차가 적고 이미 완성도있는 시세계를 갖추었다는 점에서 자신만의 화법과 감각을 단련해온 시간을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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