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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학
시간과 물결의 강을 주시하며
시간이 또 다른 강임을 상기하는 것,
우리들도 강처럼 흘러가리라는 것과
얼굴들이 물결처럼 지나쳐 가는 것을 깨닫는 것.
불면은 꿈꾸지 않기를 꿈꾸는
또 다른 꿈임을,
우리네 육신이 저어하는 죽음은
꿈이라 칭하는 매일 밤의 죽음임을 체득하는 것.
하루와 한 해에서 인간의 날들과
해[年]들의 상징을 보는 것. *
세월의 전횡을
음악, 속삭임, 상징으로 바꾸는 것.
죽음에서 꿈을 보는 것.
낙조에서 서글픈 황금을 보는 것.
가련한 불멸의 시는 그러한 것.
시는 회귀하나니, 여명과 황혼처럼.
이따금 오후에 한 얼굴이
거울 깊숙이서 우리를 응시하네.
예술은 우리 얼굴을
비추는 거울이어야 하네.
경이에 지친 오뒷세우스는
멀리 소박한 초록의 이타케**가 보였을 때
애정으로 눈물을 흘렸다고 하지.
예술은 경이가 아니라 초록의 영원인 그 이타케.
예술은 또한, 나고 드는
끊임없는 강물과도 같은 것.
끊임없는 강물처럼, 본인이자 타인인
유전(流轉)하는 헤라클레이토스 자신의 거울.
* 보르헤스는 한 사람의 인생을 하나 혹은 몇 개의 사건과 그 순간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오뒷세우스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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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역사가 전하네.
실제, 상상, 의혹의 일들이
무수히 교차했던 옛날 옛적,
한 권의 책에 우주를 담으려는
터무니없는 계획을 품은 이가
한없는 열정으로 임한
고귀하고 치열한 원고를 마치며
공들인 마지막 행을 낭송했네.
운명의 여신에게 감사를 표하려 했지.
그런데 눈을 들었을 때
공중에서 빛나는 원을 보고 얼이 빠졌네.
달을 잊었던 거지.
설령 허구일지라도,
이 이야기는 우리네 삶을 언어로 바꾸는
일을 하는 이들에게는
저주를 연상시키네.
본질은 언제나 상실되는 것.
영감을 지배하는 절대적 법칙이지.
달과의 내 오랜 실랑이에 대한
다음 요약도 피할 수 없을.
나는 달을 어디서 처음 봤는지 모르네.
그리스인이 말한 전생의 하늘에서였는지,
우물과 무화과나무의
정원으로 저무는 오후에서였는지.
유전하는 이 삶은
어찌 되었든 무척 아름다울 수도 있지.
그리고 그녀와 함께 달을 바라본
오후에 있었네. 아, 우리가 공유했던 달이여.
내겐 한밤중 달보다
시 속의 달이 더 기억나네.
발라드를 공포로 물들인 마법에 걸린 월룡(月龍),
케베도의 피비린내 나는 달.
요한은 흉악한 경이와
잔혹한 환희의 책에서*
붉은 선혈이 낭자한 달을 논하지.
한층 영롱한 은빛 달도 있지.
(구전되기를)
피타고라스는 거울에 피로 글을 썼고,
또 다른 거울인 달에서
사람들이 그 반영을 읽었네.
커다란 늑대가 사는 강철 밀림이 있네.
마지막 오로라가 바다를 붉게 물들일 때
달을 쓰러뜨리고 죽음을 내리는
기인한 운명을 지녔지.
(예지자 북극성도 아는 일이었네.
사자(死者)의 손발톱으로 만든 배가 그날,
온 세상의 열린 바다에 악취를 퍼뜨리리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네.)
제네바에서인지 취리히인지
운명이 나 역시 시인이 되기를 원했을 때,
달을 정의해야 한다는 은밀한 의무를
남들처럼 짊어졌지.
일종의 학구적 번민에 싸여
온갖 어줍잖은 달에 대한 수사를 탕진했네.
루고네스가 이미 호박(琥珀)이나 모래로
표현했을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두려움에 싸여.
아스라한 상아, 연기, 차가운 눈이
시에서 빛을 발했던 달들이네.
활자에 다다르는 지난한 영예는
얻을 수 없었지만.
에덴동산의 붉은 아담**처럼,
시인이란 각 사물마다
알려지지 않았던 정확하고 참된 이름을
붙이는 이라고 생각했네.
아리오스토가 내게 가르쳐 주었지.
하 수상한 달에는
꿈, 움켜쥘 수 없는 어떤 것, 상실의 시간,
본질적으로는 똑같은 가능과 불가능이 거주한다고.
아폴로도로스***는 세 가지 형상을 한 디아나****를 통해
마법의 그림자를 언뜻 보는 것을 내게 허락했네.
빅토르 위고는 내게 황금 낫을 주었고,
어느 아일랜드인은 그의 검은 비극적 달을 주었네.
그리고 내가 신화 속의
달들의 광맥을 탐문하고 있을 때,
길모퉁이만 돌면
날마다 하늘에 달이 떠 있었네
모든 단어 중 달을 기억하고 형상화할
하나가 있음을 나는 아네.
그것을 겸허히 사용하는 것이 비결이지.
달이라는 단어네.
나는 이제 미망의 이미지로 감히
달의 지순한 출현을 더럽히지 않지.
내 문학을 초월하는
불가해하고 일상적인 달.
나는 아네.
달 혹은 달이라는 단어는
여럿이고 하나인 기묘한 존재, 인간이
복잡한 글쓰기를 위해 창조한 어휘임을.
영광스러운 환희의 날이나 죽음의 날에 이르러서야
그것의 참 이름을 쓸 수 있도록,
운명 혹은 우연이
인간에게 준 하나의 표상이지.
* 「요한 계시록」을 말함.
** 히브리 말로 '아담'은 붉은 흙이라는 뜻.
*** 기원전 5세기에 활동한 그리스의 화가. 빛과 색채의 변화를 이용한 명암법을
최초로 회화에 도입하여 인물에 현실감을 부여했다.
**** 로마 신화의 들짐승과 사냥의 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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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나는 거울에 공포를 느꼈네.
상(像)들만의 거짓 공간.
거처할 수 없는 공간이 다하고 시작하는
침투할 길 없는 거울 면 앞에서는 물론,
파문이 일거나, 역상(逆像)의 새가 이따금
환영의 날갯짓을 아로새기는 수면,
자신만의 심연의 하늘에 또 다른
푸르름을 모방하는 그 수면 앞에서도
아련한 대리석과 장미의 순백색을
꿈처럼 답습하는 윤기를 지닌
오묘한 흑단의
고즈넉한 표면 앞에서도.
유전(流轉)하는 달빛 아래
당혹스러운 세월을 숱하게 방랑한 뒤, 오늘
나는 어떤 운명의 장난으로
거울에 공포를 느끼게 된 것인지 묻는다.
금속의 거울들,
응시하고 응시되는 얼굴이
붉은 노을 안개 속에 흐릿해지는
마호가니 가면 거울,
그 옛날 협약의 근원적 집행자들이
잠들지도 않고 숙명처럼,
생식하듯 세계를 복제하는 것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네.
그들이 자신의 현란한 거미줄에
이 모호하고 덧없는 세계를 연장시키네.
죽지 않은 한 인간의 숨결이
이따금씩 오후에 거울을 흐릿하게 하지.
거울이 우리를 노리고 있네.
네 벽으로 둘러싸인 침실에 거울이 하나 있다면,
나는 이미 혼자가 아니지, 타인이 있는 것이네.
여명에 은밀한 연극을 연출하는 상(像)이.
신비스러운 랍비들처럼
거꾸로 책을 읽는 거울의 방에서는
모든 일이 일어나지만
아무것도 기억되지 않네.
어느 날 오후의 꿈속 왕이었던 클로디어스*는
한 배우가 무대에서 그의 비열함을
무언극으로 연출한 그날까지
한바탕 꿈인 줄 몰랐네.
기묘한 일이지.
꿈이 존재하고 거울이 존재한다는 것은.
상투적이고 마모된 일상에 상(像)들이 획책한
심오한 환영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은.
(나는 늘 생각하였네)
신은 거울 면의 매끈함으로 빛을,
꿈으로는 어둠을 만드는
온통 불가사의한 건축술에 골몰한다고.
인간이 한낱 반영과 미망임을 깨닫도록
신은 꿈으로 수놓은 밤과
갖가지 거울을 창조하였네.
그래서 우리는 흠칫할 수밖에.
* 《햄릿》의 등장인물로 햄릿의 아버지를 죽이고 그의 어머니와 결혼한 인물.
햄릿의 복수의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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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꿈
어렸을 때 나는 열렬히 호랑이를 숭배했다. 파라나강*
수초나 울창한 아마존의 얼룩 호랑이**가 아니라 아시아의
진짜 줄무늬 호랑이, 오직 코끼리 위의 성채에 탄 전사들만
대항할 수 있는 호랑이를. 나는 동물원 우리 앞에 끝없이
머무르곤 했다. 방대한 분량의 백과사전과 자연사 책들을 그
속에 담긴 호랑이들의 광휘 때문에 예찬하고는 했다. (아직도
그 호랑이 모습들을 기억한다. 여인의 얼굴이나 미소는
제대로 기억 못 하는 내가.) 유년기가 끝났고, 호랑이와 이에
대한 열정은 퇴색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호랑이 꿈을
꾼다. 그 심연에 혹은 태초의 혼돈 속에 여전히 존속한다.
잠이 들면 나는 이런저런 꿈에 시달리다가 갑자기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이건 꿈이니까
그저 내 뜻대로 즐기면 그뿐이라고, 꿈에서는 무제한의 힘이
있으니 호랑이를 꿈꾸면 된다고.
아, 무능력한 나! 꿈은 결코 내가 갈망하던 맹수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호랑이가 등장은 한다. 그러나 박제된
호랑이, 허약한 호랑이, 엉뚱한 모양이 호랑이, 턱없는
크기의 호랑이, 너무 단명하는 호랑이, 개나 새를 닮은
호랑이가.
* 브라질, 파라과이, 아르헨티나를 흐르는 강.
** 스페인어에서는 표범, 재규어, 퓨마 등을 '호랑이(tigre)'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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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그는 결코 기억에 집착하지 않았다. 갖가지 인상(印象)이
순간적이고 생동감 있게 그를 덮쳤다. 그의 영혼 전체에
도공의 주색 유약, 별이자 신이 가득한 아치 천장, 지상으로
추락한 사자의 고향이었던 달, 예민한 손끝으로 더듬는
대리석의 매끄러움, 새하얗고 고르지 못한 치아로 즐겨
물어뜯던 멧돼지 고기의 맛, 페니키아 단어 하나, 누런
모래에 드리워진 창(槍) 그림자, 바다 혹은 여인들과의
근접성, 꿀로 떨떠름한 맛을 경감시키는 진한 포도주 등이
기억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는 두려움은 물론 분노와
용기도 알고 있었다. 한번은 적의 성벽을 선두로 기어오른
적도 있었다. 갈증과 호기심으로 우연에 몸을 맡기고,
환희에 들뜨다가도 이내 무관심해지는 태도를 법칙 삼아
다양한 땅들을 돌아다니고, 여기저기 해안에서 배에서
인간들의 도시며 궁전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시장에서 혹은 사티로스*도 있을 듯한 아스라한 산의
밑자락에서 복잡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보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마치 현실을 그냥
받아들이듯이,
아름다운 우주가 점점 그를 버렸다. 완고한 안개에 손
윤곽이 지워졌고, 밤하늘의 별이 사라졌고, 발밑에 있는
대지가 불안정해졌다. 모든 것이 아스라해지고 뒤섞였다.
자신이 눈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비명을
질렀다.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적 품위가 아직 출현하기
전이고, 헥토르는 체면 깎이지 않고 도망칠 수 있던
시절이었다.**
··· 중략 ···
그 기억에서 또 다른 기억이 싹텄다. 마찬가지로 모험이
임박한 밤이었다. 한 여인, 신들이 그에게 준 최초의 여인이
지하 묘지의 어둠 속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는 돌그물
같은 통로에서, 어둠 속으로 꺼지는 내리막길에서 그녀를
찾아 헤맸다. 왜 그 기억들이 엄습했던 것일까? 왜 그저
현재의 예표(豫表)*** 이기라도 한 것처럼 별다른 씁쓸함 없이
엄습했던 것일까?
그는 묵직한 놀라움을 느끼며 깨달았다. 그가 인간의
눈을 하고 내려가고 있는 이 밤에 사랑과 위험이, 즉
아프로디테와 아레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영광의 소리와 6보격 시 소리, 신들이 구원해 주지 않을
신전을 지키는 사람들 소리와 바다에서 사랑하는 섬을
찾아 헤매는 검은 배들의 소리, 인간의 기억 속에서 불리고
울려 퍼질 운명의 『오뒷세이아』와 『일리아스』 소리를 이미
예감했기(이 소리들에 의해 이미 포위되었기) 때문이다.
* 인간의 얼굴에 염소의 뿔과 다리를 한 그리스 신화의 숲의 신.
**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와 최후의 일전에 나섰다가 겁을 먹고
성벽 주위를 세 바퀴나 돌면서 도망친 일을 가리킴.
*** 예언 등을 미리 보여 주는 조짐을 뜻하는 기독교 용어.
**** 아프로디테는 사랑의 여신, 아레스는 전쟁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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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Jorge Luis Borges:
1899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20세에 스페인으로 이주하였으며
전위주의 문예운동 '울트라이스모'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창작 시작.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와 아르헨티나 문단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다. 단편소설 『픽션들』 『알레트』 등이 세계적으로 주목받음. 그는 많은 소설과 시, 평론, 에세이들을 발표하며 문학의 본질과 형이상학적 주제들에 대해 탐구했고, 수많은 작가와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프란츠 카프카, 제임스 조이스 등과 함께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지 못한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하나로 불린다.
보르헤스는 첫 시집이자 첫 책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기』(1923)와 『정면의 달』(1925)을 출간한 후 30년간 시를 쓰지 않았으나, 시력을 상실한 1955년 이후, 다시 시 창작으로 돌아와 정형시를 많이 남겼다. 『작가』는 이때의
대표 작품이다. 도서관 사서로 오랫동안 일했고, 페론 정권의 붕괴 이후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 관장이 되었다. 1986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