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142 2025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토마토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안수현 시인. 토마토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안수현 윗집은 오늘도 많이 더운가 보다 아무렇게나 잘라두어 우리 집 창문에 아른거리는 에어컨 실외기 호스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엄마는 시끄럽다면서도 마른 토마토 화분을 물자리에 밀어둔다 새순 발끝을 받치고 있는 큰 줄기 손끝이 새파랗다 너를 이렇게밖에 밀어올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는 누군가와 닮았다 왜 자꾸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 걸까, 그냥 그렇게 된 건데 우린 순진한 토마토일 뿐인데 어차피 충분히 어른이 되면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자신을 떨어뜨려야 할 텐데 땅에서 났으면서도 먼 하늘만 보고 자라 땅에 묻히기를 두려워하는 엄마 없는 엄마와 엄마밖에 없는 딸 토마토는 어디에서든 뿌리를 내린다 홀로 오래 있었던 토마토 과.. 2025. 1. 7. 202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디스토피아」, 백아온 시인. 디스토피아 백아온 플라스틱 인간을 사랑했다. 손등을 두드리면 가벼운 소리가 나는. 그는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말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자기가 피우는 카멜 담배의 낙타가 원래는 이런 모양이 아니었다거나 레몬청을 시지 않게 만드는 법 같은 것들을 말해줬다. 나는 그의 말들을 호리병에 넣어두었다. 언젠가 그것들로 유리 공예를 하고 싶었다.매일매일 그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항상 쇼윈도 불이 꺼지고, 조명 상가들도 문을 닫았다. 집에 돌아가면 투명한 호리병을 한참 바라보다 잠이 들곤 했다. 그의 작은 이야기들을 모아둔 호리병을.그와 있다 보면, 아주 잠깐이지만, 세상이 진짜라고 믿어졌다. 그도 마찬가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025. 1. 7. ■ 차도하 시인의 시 ■ 입국 심사 & 쉘 위 댄스 & 빈집 & 추모 & 미래의 손. 입국 심사 천국은 외국이다. 어쨌든 모국은 아니다. 모국은 우리나라도 한국도 아니다. 천국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입국할때 모든 엄마를 버려야 한다. 모국을. 모국어를. 모음과 자음을 발음하는 법을. 맘 - 마음 - 맘마를. 먹으면 되는 것과안 되는 것을. 밥그릇을. 태어나고 길러진 모든 습관을. 살아가며 했던 모든 말이 적힌 책을 찢어 파쇄기에 넣는다. 나풀나풀 얇은 가루가 된 종이를 뭉쳐 날개를 만든다.날개를 달면 거기 적혔던 모든 말을 잊어버린다. 날고 싶은 방향으로 날아간다. 그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된 사람들은 천사를 보았다 말하겠지만 천국의 주민들은 천사라는 단어를 모른다. 그것은 깃털의 일부가 되었을 따름이고 다른 단어와 같은 무게를 지녔다. 때.. 2025. 1. 2. ■ 유희경 시인의 시■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 당신의 자리 & 내일, 내일 & 코트 속 아버지 & 벌거벗은 두 사람의 대화.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 ··· ] 나는 나로부터 날카롭다 서너 토막 나는 이런 것을 너덜거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1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식탁 위에 고지서가 몇 장 놓여 있다 어머니는 자신의 뒷모습을 설거지하고 벽 한쪽에는 내가 장식되어 있다 플라타너스 잎맥이 쪼그라드는 아침 나는 나로부터 날카롭다 서너 토막 나는 이런 것을 너덜거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2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면도를 하다가 그제 벤 자리를 또 베였고 아무리 닦아도 몸에선 털이 자란다 타일은 오래되면 사람의 색을 닮는구나 베란다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삼촌.. 2024. 12. 31. 이전 1 2 3 4 5 ··· 3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