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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희연의 세 번째 시집 읽기 ■ 굴뚝의 기분 & 면벽의 유령 &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 풍선 장수의 노래 & 열과(裂果) 너는 어둠 위에 어둠을 껴입고  괜찮아 괜찮아, 늙은 개를 타일러  새 꽃병을 사러 간다 굴뚝의 기분     너는 꽃병을 집어 던진다  그것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네 삶이라는듯이   정오  너는 주저앉고  보란 듯이 태양은 타오른다   너는 모든 것이 너를 조롱하고 있다고 느낀다  의자가 놓여 있는 방식  달력의 속도  못 하나를 잘못 박아서 벽 전체가 엉망이 됐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너의 늙은 개는 집요하게 벽을 긁고 있다   거긴 아무것도 없어  칼을 깎는 사과는 없어  찌르면 찌르는 대로  도려내면 도려내는 대로   우리는 살아가야 하고  얼굴은 빗금투성이가 되겠지  돌이켜보면 주저앉는 것도 지겨워서   너는 어둠 위에 어둠을 껴입고  괜찮아 괜찮아, 늙은 개를 타일러  새 꽃병을 사러 간다 .. 2024. 6. 6.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창조자』에서, 축복의 시 & 체스 & 또 다른 호랑이- 그리고 유사하게 창조하는 기술 ■ 축복의 시*-마리아 에스테르 바스케스**에게     누구도 눈물이나 비난쯤으로 깎아내리지 말기를.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 그 오묘함에 대한  나의 허심탄회한 심경을.   신은 빛을 여읜 눈을  이 장서 도시의 주인으로 만들었다.  여명마저 열정으로 굴복시키는 몰상식한 구절구절을  내 눈은 꿈속의 도서관에서 읽을 수 있을 뿐.   낮은 무한한 장서를 헛되이  눈에 선사하네.  알렉산드리아에서 소멸한 원고들 같이  까다로운 책들을.   (그리스 신화에서) 샘물과 정원 사이에서  어느 한 왕이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어 갔네.  높고도 깊은 눈먼 도서관 구석구석을  나도 정처 없이 헤매이네.   백과사전, 아틀라스, 동방  서구, 세기, 왕조,  상징, 우주, 우주론을  벽들이 하릴없.. 2024. 6. 4.
페르난투 페소아 Fernando Pessoa,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 에서. 담배 가게 & 포르투풍 내장 요리 & 승리의 송시 담배 가게(부분)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영영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가 되기를 원할 수조차 없다.  이걸 제외하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꿈을 품고 있다.   내 방의 창문들,  아무도 누군지 모르는 이 세상 수백만 개 중 하나인 내          방에서,  (그리고 만약 안다 한들, 뭘 안단 말인가?)  너희는 행인들이 끊임없이 다니는 어느 길의 신비로 나           있구나,  그 어떤 생각들에도 접근 불가한 길로,  진짜, 말도 안 되게 진짜이며, 맞는, 알 수 없게 맞는 길로,  돌들과 만물 아래 존재하는 것들의 신비와 함께,  벽을 습기로 채우고 머리카락을 희끗하게 만드는 죽음과           함께,  전부의 마차를 무(無)의 큰길로 모는 운명과 함께.   나는 .. 2024. 6. 3.
■ 최세라 시인의 시 ■ 백장미 & 사이다 병 조각이 박힌 담장 & 포르테 아 포르테 &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 & 생일 선물 숨이 턱 막히게 눈이 쌓이면  그런 걸 꽃이라 부른다면  꽤나 괜찮게 동면하는 것 혹은 죽어가는 것 백장미     나의 넋이 나가겠지  불땀을 빼며 자주 혹은 아주 가끔씩   물을 마실 때마다  컵 속에 너울거리는 혀가 한 잎 또 한 잎   아주 끝까지 색을 빼는 것이겠지  네 안에 너 자신이 결핍돼 있는 것처럼  내 혀로 사랑을 부정하며 살아왔다   불에서 걸어 나온 것들만 꽃이 되는 건 아니야   마지막 연탄불을 드러내는 날  숨이 턱 막히게 눈이 쌓이면  그런 걸 꽃이라 부른다면  꽤나 괜찮게 동면하는 것 혹은 죽어가는 것   아픔은 평등하지 않아  온몸에 돋친 가시로 눈을 가릴 때  목 위로 새하얗게 질리고 그 밑에 피가 고이는 순간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요   내가 완.. 2024. 6.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