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시인들94 ■ 허수경 시인의 시■ 이국의 호텔 & 너무 일찍 온 저녁 & 내 손을 잡아줄래요? & 사진 속의 달 & 빙하기의 역 자연을 과거 시제로 노래하고당신을 미래 시제로 잠재우며 이곳까지 왔네 이국의 호텔에 방을 정하고 이국의 호텔 휘파람, 이 명랑한 악기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우리에게 날아온 철새들이 발명했다 이 발명품에는그닥 복잡한 사용법이 없다 다만 꼭 다문 입술로 꽃을 피우는 무화과나 당신 생의 어떤 시간 앞에서 울던 누군가를 생각하면 된다 호텔 건너편 발코니에는 빨래가 노을을 흠뻑 머금고 붉은 종잇장처럼 흔들리고 르누아르를 흉내낸그림 속에는 소녀가 발레복을 입고 백합처럼 죽어가는데 호텔 앞에는 병이 들고도 꽃을 피우는 장미가 서있으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장미에 든 병의 향기가 저녁 공기를 앓게 하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자연을 과거 시제로 노래하고 당신을 미래 시제로잠재우며 이곳.. 2024. 5. 14. ■ 하재연 시인의 시 ■ 양양 & 화성의 공전 & 너의 라디오 & 양피지의 밤 & 우주 바깥에서 물고기는 눈을 감지 못하니까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다고 양양 열 마리 모래무지를 담아두었는데 바다로 돌려보낼 때 배를 드러낸 채 헤엄치지 못했다고 했다. 집에 와 찾아보니 모래무지는 민물고기라고 했다. 누군가의 생일이라 쏘아 올린 십 연발 축포는 일곱 발만 터져 행운인지 불운인지 모르겠다고 노란 눈알이 예뻤는데 물고기는 눈을 감지 못하니까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다고 했다. 인간의 죽음과는 연관하지 않고아름다운푸른 불꽃의 석양 쪽으로 가산되는 화성의 공전 암뿌우르에 봉투를 씌워서 그 감소된 빛은 어디로 갔는가-이상, 「지도의 암실」 지구에서 지낸 밤이 깊어질수록 나는 점점 더 부족해진다. 더 많은 나의 숨이 필요하다. 뒤집어져 불길로 타오르는 것 망.. 2024. 5. 13. ■ 강혜빈 시인의 시■ 커밍아웃 & 미니멀리스트 & 일곱 베일의 숲 & 바깥의 사과 & 밤의 팔레트 옷장에서 알록달록한 비밀이 흘러나와자라지 않는 발목 아래로, 말은 잊은 양탄자 사이로기꺼이 불가능한 토마토에게로 커밍아웃 축축한 비밀 잘 데리고 있거든 일찌감치 날짜가 지난 토마토 들키지 않고 물컹한 표정은 냉장고에 두고 나는 현관문을 확인해야 해 아픈 적 없는 내일을 마중 나가며 취한 바람이 호기롭게 골목을 휘돌아 나갈 때 나뭇잎이 되고 싶어 아무 데서나 바스러지는 우리가 서로를 껴안을 때 흔들리는 그늘 더 낮은 곳으로 자리를 옮겨 가는데 아무도 모르는 놀이터에서 치마를 까고 그네를 탔어 미끄럼틀과 시소의 표정 낮지도 높지도 않은 마음을 가지자 혼자라는 단어가 낯설어지면 얼음 땡, 크레파스 냄새 나는 빨주노초 아이들 웃음먼지를 풍기며 뛰어나가고 배 속에선 만.. 2024. 5. 11. ■ 배수연 시인의 시 ■ 조이와의 키스 & 청혼 & 조이라고 말하면 조이라고 & 그는 참 좋은 토스트였습니다 & 야간 비행 우리의 키스는 조이가 매일 쏟았던 홍차의 테두리를 더 진하게, 진하게 그려 줄 것이다 조이와의 키스 * 조이의 어금니 중 하나는 박하사탕일 것이다 나는 늘 그 안쪽을 열심히 핥아 주고 싶었다 조이네 집 아치 위로 무거워지는 장미 조이는 아침으로 무엇을 먹을까 * 나는 조이네 집 뒤에 서서 팔목을 흔드는 널린 이불 피로해진 그 애가 눈을 감으면 비밀이 눈뜨는 오후의 티타임 졸린 조이는 테이블 위로 홍차들 쏟을 것이다 테이블보는 내 옆에 널릴 것이고 나와 태양은 숨은 얼룩을 다시 찾아낼 것이다 * 자주 물구나무를 서는 조이 다리 사이로 발목을 감싸는 매끄.. 2024. 5. 10. 이전 1 ··· 13 14 15 16 17 18 19 ··· 2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