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시인들95 ■ 심은섭 시인의 시 ■ 백일홍나무 아래에서의 고백 & 아내& Y셔츠 두 번째 단추을 끼울 때 & 경주 김씨 달안의 딸 & 7번 국도 백일홍나무 아래에서의 고백 해당되는 것에 O표 하시오 순종이다 흰 그림자이고 새벽에 배달된 과즙이다 흔들려야 정오를 기억하는 시계추다 수평선에 걸터앉아 인간의 비극의 기원이 어딘지를 찾는 0시의 태양이다 겨울 동안 찬바람에 살찐 얼음일 뿐이다 기침하는 사랑방으로 보낸 장문의 편지이고, 터진 슬픔을 꿰매는 상처의 바늘이다막다른 골목의 계단을 쌓는 미장공이다 어는 날엔 살아있는 사육신이었고, 꽃을 피우는 일이 혁명이 아니라고 귀를 잘라버린 봄이다 고독한 오후를 되새김길하는 낭만의 양 떼, 단추처럼 붙어사는 나는 백일홍나무 아레에서 하늘을 쳐다본다 어느 곳 하나 O표 할 데 없다 아내 얼굴은 하얀 목련이지만 뒷모습은 사월 초파일이다 나와 함께 한 방향으로 기관총을 쏘는 총잡이다 내가.. 2024. 6. 8. ■ 안희연의 세 번째 시집 읽기 ■ 굴뚝의 기분 & 면벽의 유령 &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 풍선 장수의 노래 & 열과(裂果) 너는 어둠 위에 어둠을 껴입고 괜찮아 괜찮아, 늙은 개를 타일러 새 꽃병을 사러 간다 굴뚝의 기분 너는 꽃병을 집어 던진다 그것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네 삶이라는듯이 정오 너는 주저앉고 보란 듯이 태양은 타오른다 너는 모든 것이 너를 조롱하고 있다고 느낀다 의자가 놓여 있는 방식 달력의 속도 못 하나를 잘못 박아서 벽 전체가 엉망이 됐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너의 늙은 개는 집요하게 벽을 긁고 있다 거긴 아무것도 없어 칼을 깎는 사과는 없어 찌르면 찌르는 대로 도려내면 도려내는 대로 우리는 살아가야 하고 얼굴은 빗금투성이가 되겠지 돌이켜보면 주저앉는 것도 지겨워서 너는 어둠 위에 어둠을 껴입고 괜찮아 괜찮아, 늙은 개를 타일러 새 꽃병을 사러 간다 .. 2024. 6. 6. ■ 최세라 시인의 시 ■ 백장미 & 사이다 병 조각이 박힌 담장 & 포르테 아 포르테 &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 & 생일 선물 숨이 턱 막히게 눈이 쌓이면 그런 걸 꽃이라 부른다면 꽤나 괜찮게 동면하는 것 혹은 죽어가는 것 백장미 나의 넋이 나가겠지 불땀을 빼며 자주 혹은 아주 가끔씩 물을 마실 때마다 컵 속에 너울거리는 혀가 한 잎 또 한 잎 아주 끝까지 색을 빼는 것이겠지 네 안에 너 자신이 결핍돼 있는 것처럼 내 혀로 사랑을 부정하며 살아왔다 불에서 걸어 나온 것들만 꽃이 되는 건 아니야 마지막 연탄불을 드러내는 날 숨이 턱 막히게 눈이 쌓이면 그런 걸 꽃이라 부른다면 꽤나 괜찮게 동면하는 것 혹은 죽어가는 것 아픔은 평등하지 않아 온몸에 돋친 가시로 눈을 가릴 때 목 위로 새하얗게 질리고 그 밑에 피가 고이는 순간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요 내가 완.. 2024. 6. 2. ■ 김유자 시인의 시 ■ 덜그럭거리는 숲 & 백야라는 부사 & 식탁의 다리 & 물고기의 가역반응 & 슈만의 구두 가게 책상은 서랍을 빼물고 덜걱거린다 당신은 나를 꺼낸다 물고리 없는 숲이 펼쳐진다 덜그럭거리는 숲 서랍 속에 누워 있다 밤을 좋아하지만 밤은 계속 밤이다 서랍 속에는 문고리가 없다 덜그럭거리는 심장 열리지 않는 숲 밖에선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나 없는 세계는 이야기일 뿐 나 있는 세계도 여기에선 이야기여서 울창한 그림자에 담겨 나는 하늘을 떠올린다 구름이 게으르게 흐르고 바람이 내려앉지 못하고 별들은 시린 발을 꼼지락거리고 구름과 땅을 비가 꿰맬 때 당신은 책상 위에 시침처럼 엎드려 있다 여전히 밤인데도 당신의 심장이 문을 두드린다 눈 덮인 숲에서 나무들이 컹컹 짖고 눈처럼 먼지가 날아오르고 하늘이 흔들리고 새들이 떨어져 내리고 나는 쓸려 가지 않으려 이야기.. 2024. 5. 31. 이전 1 ··· 10 11 12 13 14 15 16 ··· 2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