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시인들93 ■ 최세라 시인의 시 ■ 백장미 & 사이다 병 조각이 박힌 담장 & 포르테 아 포르테 &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 & 생일 선물 숨이 턱 막히게 눈이 쌓이면 그런 걸 꽃이라 부른다면 꽤나 괜찮게 동면하는 것 혹은 죽어가는 것 백장미 나의 넋이 나가겠지 불땀을 빼며 자주 혹은 아주 가끔씩 물을 마실 때마다 컵 속에 너울거리는 혀가 한 잎 또 한 잎 아주 끝까지 색을 빼는 것이겠지 네 안에 너 자신이 결핍돼 있는 것처럼 내 혀로 사랑을 부정하며 살아왔다 불에서 걸어 나온 것들만 꽃이 되는 건 아니야 마지막 연탄불을 드러내는 날 숨이 턱 막히게 눈이 쌓이면 그런 걸 꽃이라 부른다면 꽤나 괜찮게 동면하는 것 혹은 죽어가는 것 아픔은 평등하지 않아 온몸에 돋친 가시로 눈을 가릴 때 목 위로 새하얗게 질리고 그 밑에 피가 고이는 순간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요 내가 완.. 2024. 6. 2. ■ 김유자 시인의 시 ■ 덜그럭거리는 숲 & 백야라는 부사 & 식탁의 다리 & 물고기의 가역반응 & 슈만의 구두 가게 책상은 서랍을 빼물고 덜걱거린다 당신은 나를 꺼낸다 물고리 없는 숲이 펼쳐진다 덜그럭거리는 숲 서랍 속에 누워 있다 밤을 좋아하지만 밤은 계속 밤이다 서랍 속에는 문고리가 없다 덜그럭거리는 심장 열리지 않는 숲 밖에선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나 없는 세계는 이야기일 뿐 나 있는 세계도 여기에선 이야기여서 울창한 그림자에 담겨 나는 하늘을 떠올린다 구름이 게으르게 흐르고 바람이 내려앉지 못하고 별들은 시린 발을 꼼지락거리고 구름과 땅을 비가 꿰맬 때 당신은 책상 위에 시침처럼 엎드려 있다 여전히 밤인데도 당신의 심장이 문을 두드린다 눈 덮인 숲에서 나무들이 컹컹 짖고 눈처럼 먼지가 날아오르고 하늘이 흔들리고 새들이 떨어져 내리고 나는 쓸려 가지 않으려 이야기.. 2024. 5. 31. ◆ 박상순 시인의 시 ◆ 양 세 마리 &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1 & 빵 공장으로 통하는 철도로부터 22년 뒤 & 자네트가 아픈 날 1 풀밭에는 분홍 나무 풀밭에는 양 세 마리 두 마리는 마주 보고 한 마리는 옆을 보고 양 세 마리 풀밭에는 분홍 나무 풀밭에는 양 세 마리 두 마리는 마주 보고 한 마리는 옆을 보고 오른쪽 가슴으로 굵은 선이 지나가는 그림 찍힌 티셔츠 한 장 샀어요 한 마리는 옆을 보고 두 마리는 마주 보고 풀밭에는 양 세 마리 한 마리는 옆을 보고 두 마리는 마주 보고 오른쪽 가슴으로 굵은 선이 지나는 그림 찍힌 티셔츠 한 장 샀어요 한 마리는 옆을 보고 두 마리는 마주 보고 나는 그녀를 통해 사라지는 세계를 본다. 사라져가는 세계의 푹풍에 취해 그녀가, 흰 천 위에 나뒹굴 때// 나는 피를 뽑는다 ···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1 언제부터.. 2024. 5. 28. ■ 마윤지 시인의 시 ■ 아이들 & 여름 촉감 & 여름 방학 & 이 세계를 걱정하는 방법 & 타임 코드 시시해 놀이터에 종을 놓고 돌아왔어 매일매일 생각나 매일매일 그렸어 아이들 * 종을 흔들었어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어 시시해 놀이터에 종을 놓고 돌아왔어 매일매일 생각나 매일매일 그렸어 * 옛날 옛적에 귀신이 살았습니다 귀신이 살아 있어? 아 귀신이 죽었습니다 죽고 나서 귀신이 되었습니다 * 이제 볼 수 있지 휘파람 둥지에 웅크린 휘파람 휘파람을 떨어트려 죽이는 휘파람 차에 치인 휘파람 다시 다시 알을 깨고 휘파람 젖은 옷이 따뜻해 속이 다 비치는데 무엇에도 뚫리지 않을 것같이 여름 촉감 분수 광장의 아이들 손을 잡고 한 줄로 걷는다 물이 솟는 블록을 찾아 다음 차례를 기다렸다가 더 가까이 낮은 환하고 광장은.. 2024. 5. 26. 이전 1 ··· 10 11 12 13 14 15 16 ··· 2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