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시인들93 ■ 황유원 시인 ■ 2023 제68회 현대문학상 수상작 「하얀 사슴 연못」 외 6편. 하얀 사슴 연못 백록담이라는 말에는 하얀 사슴이 살고 있다 이곳의 사슴 다 잡아들여도 매해 연말이면 하늘에서 사슴이 눈처럼 내려와 이듬해 다시 번성하곤 했다는데 이제 하얀 사슴은 백록담이라는 말 속에만 살고 벌써 백 년째 이곳은 지용의 『백록담』 표지에서 사슴 모두 뛰쳐나가고 남은 빈자리 같아 그래도 이곳의 옛 선인들이 백록으로 담근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백록은 어쩌면 동물이 아니라 기운에 가깝고 뛰어다니기보다는 바람을 타고 퍼지는 것에 가까워 백록담, 이라고 발음할 때마다 『백록담』 표지 밖에서 표지 안으로 돌아오는 것도 같고 하얀 사슴 몇 마리가 백록담 위를 찬바람처럼 달려가고 있을거라는 생각만으로도 머릿속은 청량해진다 연못에 잠시 생각의.. 2024. 7. 10. ■ 길상호 시인의 시 ■ 우리의 죄는 야옹 & 가디마이 & 잠잠 & 그림자 사업 & 빗방울 사진. 남몰래 길러온 발톱을 꺼내놓고서 부드럽게 닳을 때까지 물벽에 각자의 기도문을 새겼네우리의 죄는 야옹 아침 창유리가 흐려지고 빗방울의 방이 하나둘 지어졌네 나는 세 마리 고양이를 데리고 오늘의 울음을 연습하다가 가장 착해보이는 빗방울 속으로 들어가 앉았네 남몰래 길러온 발톱을 꺼내놓고서 부드럽게 닳을 때까지 물벽에 각자의 기도문을 새겼네 들키고야 말 일을 미리 들킨 것처럼 페이지가 줄지 않는 고백을 했네 죄의 목록이 늘어갈수록 물의 방은 조금씩 무거워져 흘러내리기 전에 또 다른 빗방울을 열어야 했네 서로를 할퀴며 꼬리를 부풀리던 날들, 아직 덜 아문 상처가 아린데 물의 혓바닥이 한 번씩 핥고 가면 구름 낀 눈빛은 조금씩 맑아졌네 마지막 빗방울까지 흘려보내고 나서야 .. 2024. 7. 8. ■ 황인찬 시인의 시 ■ 비역사 & 사랑을 위한 되풀이 & 아카이브 & 요가학원 &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 밤의 수영장에 혼자 있었다 비역사 밤의 수영장에 혼자 있었다 귀에 닿는 물소리 탓에 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너는 실내에서 나오지 않는다 너는 어디에서도 나온 적 없다 밤의 수영장을 혼자 걸었다 몸에 닿는 밤공기가 차가워 네가 만져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너는 실내에서 나오지 않는다 밤의 수영장에 혼자 있었다 보름달이 너무 크고 밝아 네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너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린다 너는 어디에서도 나온 적 없다 내 역할은 이야기를 반전시키는 의외의 목격자 같은 것이고 그 이후로 나는 나오지 않는다 사랑을 위한 되풀이 나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니다 나는 그저 마을 어귀의 그루터기에 앉아 사람들을 향해욕을 하거.. 2024. 7. 1. ■ 김승일 시인의 시 ■ 항상 조금 추운 극장 & 너무 오래 있었던 세계 & 2차원의 악마 & 나는 모스크바에서 바뀌었다 신이시여 잘했지요 고양이얘기로 시작하긴 했지만 고양이 얘기가 아닌 얘기를했잖아요 옛날에 알았던 사람들이 전부 영화에 나왔으면 좋겠어요 좀비로요 극장은 항상 조금 추워요 항상 조금 추운 극장 고양이와 함께 산 다음부터 고양이 얘기 아니면할 얘기가 없게 됐어요 앞으로도 남은 평생 고양이 얘기만 해도 되냐고 신에게 물었어요 그러지 말라네요 내가 고양이가 아닌데 당신은 어떻게 나를 좋아했나요 아직도 좋아하나요 극장에서 좀비 영화를 봤는데 좀비로 분장한 당신을 발견했어요 확실히 당신이었어요 표를 새로 끊고 극장에 앉아서 당신이 또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어요 잠깐만 나오더군요 당신이 나를 좋아했을 때 당신은 만나는 사람이 있었죠 곧 헤어지겠다고 하고서는 헤어지는 것을 힘들어했죠 당신이 빨리 헤어지길 바랐어요 세.. 2024. 6. 24. 이전 1 ··· 7 8 9 10 11 12 13 ··· 2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