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시인들95 ■ 황유원 시인의 시 ■ 우리 반 애들 & 무덤덤한 무덤 & 밤의 행글라이더 & 여몽환포영 & 초자연적 3D 프린팅 어쨌든 그때 그 얼굴과 함성 갑자기 떠올라 지금 나 혼자 있는 이 방 가득 메워 정신이 아득해진다우리 반 애들 싸움이 나면 와!!! 하고 모여들어 한 놈은 링을 만들고 또다른 한 놈은 선생님 오나 안 오나 망을 보게 하던 이 싸움 방해하면 죽었어, 하는 눈빛으로 싸움을 관장하던 사랑스런 우리 반 애들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얼마나 심심했으면 그렇게 끔찍이도 좋아했을까 싶은데 내가 우리 반 짱 얼굴에 침을 뱉었을 때 늘 와!!! 하던 내 절친이 그때도 와!!! 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그때 그 얼굴과 함성 갑자기 떠올라 지금 나 혼자 있는 이 방 가득 메워 정신이 아득해진다 싸우는 꿈을 꾸다 두들겨맞는 꿈을 꾸다 소스라치며 깨어나 한밤중에 차가운 변기에.. 2024. 7. 15. ■신철규 시인의 시 ■ 소행성 & 구급차가 구급차를 & 바벨 & 검은 방 & 슬픔의 자전 나는 네게 하루에 하나씩 재미있고 우스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네가 못 보고 지나친 유성에 대해 소행성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의자만 뒤로 계속 물리면 하루종일 석양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너와 나는 이 별의 반대편에 집을 짓고 산다. 내가 밤이면 너는 낮이어서 내가 캄캄하면 너는 환해서 우리의 눈동자는 조금씩 희미해지거나 짙어졌다.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적도까지 몇 발자국이면 걸어갈 수 있다. 금방 입었던 털외투를 다시 벗어 손에 걸고 적도를 지날 때 우리의 살갗은 급격히 뜨거워지고 또 금세 얼어붙는다. 우리는 녹아가는 얼음 위에서 서로를 부둥켜안는다. 나는 네게 하루에 하나씩 재미있고 우스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네가 못 보.. 2024. 7. 13. ■ 황유원 시인 ■ 2023 제68회 현대문학상 수상작 「하얀 사슴 연못」 외 6편. 하얀 사슴 연못 백록담이라는 말에는 하얀 사슴이 살고 있다 이곳의 사슴 다 잡아들여도 매해 연말이면 하늘에서 사슴이 눈처럼 내려와 이듬해 다시 번성하곤 했다는데 이제 하얀 사슴은 백록담이라는 말 속에만 살고 벌써 백 년째 이곳은 지용의 『백록담』 표지에서 사슴 모두 뛰쳐나가고 남은 빈자리 같아 그래도 이곳의 옛 선인들이 백록으로 담근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백록은 어쩌면 동물이 아니라 기운에 가깝고 뛰어다니기보다는 바람을 타고 퍼지는 것에 가까워 백록담, 이라고 발음할 때마다 『백록담』 표지 밖에서 표지 안으로 돌아오는 것도 같고 하얀 사슴 몇 마리가 백록담 위를 찬바람처럼 달려가고 있을거라는 생각만으로도 머릿속은 청량해진다 연못에 잠시 생각의.. 2024. 7. 10. ■ 길상호 시인의 시 ■ 우리의 죄는 야옹 & 가디마이 & 잠잠 & 그림자 사업 & 빗방울 사진. 남몰래 길러온 발톱을 꺼내놓고서 부드럽게 닳을 때까지 물벽에 각자의 기도문을 새겼네우리의 죄는 야옹 아침 창유리가 흐려지고 빗방울의 방이 하나둘 지어졌네 나는 세 마리 고양이를 데리고 오늘의 울음을 연습하다가 가장 착해보이는 빗방울 속으로 들어가 앉았네 남몰래 길러온 발톱을 꺼내놓고서 부드럽게 닳을 때까지 물벽에 각자의 기도문을 새겼네 들키고야 말 일을 미리 들킨 것처럼 페이지가 줄지 않는 고백을 했네 죄의 목록이 늘어갈수록 물의 방은 조금씩 무거워져 흘러내리기 전에 또 다른 빗방울을 열어야 했네 서로를 할퀴며 꼬리를 부풀리던 날들, 아직 덜 아문 상처가 아린데 물의 혓바닥이 한 번씩 핥고 가면 구름 낀 눈빛은 조금씩 맑아졌네 마지막 빗방울까지 흘려보내고 나서야 .. 2024. 7. 8. 이전 1 ··· 7 8 9 10 11 12 13 ··· 2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