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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93

◆ 박상순 시인의 심사평 ◆ 의식의 눈을 찌르는, 빛나는 언어, 발견되는 언어(제67회 현대문학상 본심 심사평) 의식의 눈을 찌르는, 빛나는 언어, 발견되는 언어-박상순    이제니의 시는 현실 대상의 표면에서 의식의 표면으로 나아간다. 이런 표면성 전환은 그녀의 시 「빛나는 얼굴로 사라지기」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 대로 바라보지 않는 오늘의 눈”이나 “마지막으로 남은 명사 하나를 밝혀내기 위해 써 내려가고 있다” 등의 표현을 통해 지각과 언어의 구조로 이루어진다. 다소 시간을 지체시키는 반복적 어휘들이 감정적인 노선으로 빠져들게 하는 듯하지만 결국 그것들의 반복 구조를 통해 한편으로는 일정한 질서를 회복하며 절망적인 도착 지점에 이른다. 그 지점은 바로 감정적인 분위기, 무드 Mood의 절망이거나 절연 지점이다. 산문 형식의 글쓰기, 냉정하게 말하자면 잡문雜文의 형식을 취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이제니의 시는 .. 2024. 8. 16.
■ 이병일 시인의 시 ■ 녹명(鹿鳴) & 마야꼽스끼의 방 & 골리앗 크레인의 도시 & 정원사 일기 & 오후 두시의 파밭 녹명(鹿鳴)    저 흰빛의 아름다움에 눈멀지 않고 입술이 터지지 않는   나는 눈밭을 무릎으로 밟고 무릎으로 넘어서는 마랄사슴이야   결코 죽지 않는 나는 발목이 닿지 않는 눈밭을 생각하는 중이야   그러나 뱃구레의 갈비뼈들이 봄기운을 못 견디고 화해질 때   추위가 데리고 가지 못한 털가죽과 누런 이빨이 갈리는  중이야   그때 땅거죽을 무심하게 뚫고 나오는 선(蘚)들이   거무튀튀한 사타구니를 몰래 들여다보는, 그런 온순한 밤이야   바닥을 친 목마름이 나를 산모롱이 쪽으로 몰아나갈 때   홀연히 드러난 풀밭은 한번쯤 와봤던 극지(劇地)였던 거야   나는 그곳에서 까마득한 발자국의 거리만큼 회복하고 싶어   무한한 초록빛에 젖은 나는 봄눈 내리는 저녁을 흘려보내듯이   봄눈 바깥으로 흘러넘치는 붉은.. 2024. 8. 15.
■고정희 시인의 시■ 밥과 자본주의 연작 중에서. 민중의 밥     평등하라 평등하라 평등하라  하느님이 펼쳐주신 이 땅 위에  하녀와 주인님이 살고 있네  하녀와 주인님이 사는 이 땅 위에서는  밥은 나눔이 아니네  밥은 평화가 아니네  밥은 자유가 아니네  밥은 정의가 아니네 아니네 아니네  평등하라 펼쳐주신 이 땅 위에,  하녀와 주인님이 사는 이 땅 위에서는   하나 되라 하나 되라 하나 되라  하느님이 피 흘리신 이 땅 위에  강도질 나라와 빼앗긴 나라의 백성이 살고 있네  강도질 나라와 빼앗긴 나라 백성이 사는 이 땅 위에서는  밥은 해방이 아니네  밥은 역사가 아니네  밥은 민족이 아니네  밥은 통일이 아니네 아니네 아니네  하나 되라 펼쳐주신 이 땅 위에,  강도질 나라와 빼앗긴 백성이 사는 이 땅 위에서는   아아 밥은 가난한 백성의 쇠.. 2024. 8. 6.
■허수경 시인의 시 ■ 나의 도시 & 비행장을 떠나면서 & 슬픔의 난민 &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나의 도시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서울 사천 함양 뉴올리언스 사이공 파리 베를린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우울한 가수들 시엔엔 거꾸로 돌리며돌아와, 내 군대여, 물에 잠긴 내 도시 구해달라고 울고   그러나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마치 남경 동경 바빌론 아수르알렉산드리아처럼 울고  도서관에서는 물에 잠긴 책들 침묵하고 전신주에서는 이런 삶이끝날 것처럼 전기를 송신하던 철마도 이쑤시개처럼 젖어 울고   나의 도시 안에서 가엾은 미래를 건설하던 시인들 울고 그 안에서  직접 간접으로 도시를 사랑했던 무용수들도 울고 울고 울고   젖은 도시 찬란한 국밥의 사랑  쓰레기도 흑빛이었다가 흰빛이었다가 보랏빛 구릿빛 빛 아닌살갗이었다가  랩도 블루스도 기타도 현도 방망이도 철판도 짐승의 가죽으로소리 내던.. 2024. 7.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