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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93

■ 정다연 시인의 시 ■ 비밀 & 사실과 진실 & 빨래 & 밑줄 & 산책 누군가에게 비밀은  버려야 살 수 있는 거  누군가에게 비밀은  간직해야 살 수 있는 거비밀     이건 내 비밀이야   아무 사이도 아닌데 한 아이가 말했다  앞으로 영원히 마주칠 일 없다는 듯이   다행히 그 말을 하고 가는 아이의 표정은  한결 가벼워진 듯했는데  나는 끙끙 앓았다  그 비밀이 무거워서   한여름에 혼자서 물이 가득 찬 어항을 옮기는 것 같았다   새어 나가면 안 되는데  실수로 깨뜨리면 안 되는데  비밀 안에서 물고기들이 평화로워야 하는데   나 때문에 잘못될까 봐  껴안고 있었다   만약 그때 널 불러 세웠다면 어떻게 됐을까?  실은 나도 너와 같은 일을 겪었어  그런데도 살고 있어  말했다면   누군가에게 비밀은  버려야 살 수 있는 거  누군가에게 비밀은  간직해야 살 수 있.. 2024. 10. 8.
■ 남진우 시인의 시 ■ 나는 어둡고 적막한 집에 홀로 있었다. 사막을 가로질러온 바람이 허공에 모래먼지를 뿌리고 지나갔다. 이내 그가 적은 말들이 바람에 불려 쓸려나갔다  나는 어둡고 적막한 집에 홀로 있었다       나는 어둡고 적막한 집에 홀로 있었다. 아이는 방바닥에엎드린 채 산수 문제를 풀고 있었다. 복잡한 수식이 적힌 노트를 들여다보며 아이는 중력 암흑물질 벌레구멍 따위를 떠올리고 있었다. 나는 어둡고 적막한 집에 홀로 있었다. 소년은 침대에 누워 천장의 사방연속무늬를 헤아리고 있었다.소년의 머릿속 은하계 저편에서 죽어가는 별이 다른 우주로 건너가기 위해 마지막 빛을 내뿜고 있었다. 나는 어둡고적막한 집에 홀로 있었다. 청년은 욕실의 차가운 벽에 등을기대고 앉아 세면대에 한 방울씩 수돗물이 떨어지는 소리를듣고 있었다.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그는 언젠가 교수.. 2024. 10. 2.
■ 이진명 시인의 시 ■ 뱀이 흐르는 하늘 & 단 한 사람 & 명자나무 & 우물쭈물 우물쭈물 & 희어서 좋은 외할머니 어느 몸에도 독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몸들이 잠깐잠깐 번쩍이는 건  역시 찬피가 숨어 빛을 쏘기 때문일까요  보석들의 근본인 차가움에 대해 생각이 미칩니다 뱀이 흐르는 하늘     하늘에는   아무도 물지 않고  뱀이 흐릅니다  흐르기 좋아하는 뱀이  길게 흐릅니다  숫자는 많지 않습니다  셋이군요  움직임 미세합니다  저토록 흰색이다가  엷은 황색을 띠기도 합니다  비치는 색지처럼 미묘히 몸 뒤집으며  그러다가 몸 풀듯 일직선을 이룹니다  발딱 일어선 일직선 말고  수평의 부드러운 일직선 말입니다  어느 몸에도 독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몸들이 잠깐잠깐 번쩍이는 건  역시 찬피가 숨어 빛을 쏘기 때문일까요  보석들의 근본인 차가움에 대해 생각이 미칩니다  그림 같습니다  뱀이.. 2024. 10. 1.
■ 박참새 시인의 시 ■ 무해한그릇-물 마시는 시 & 말하는 자에게 내려지는 벌이 있는 것일까 & 우리 이제 이런 짓은 그만해야지 & 정신머리 무해한그릇- 물 마시는 시     습기: 모든 질병의 원인*   멋지네  안타깝고   조금만 더 일찍 태어날걸  태초에 물이 있었던 거네   찰랑찰랑  걸음걸음마다 내 안에서 물이 아스르르  넘칠 것만 같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발자국이 촉촉했다   흰죽 한 그릇 주세요  아픈 사람처럼 말한다 죽은 아픈 밥이니까   너머 테이블에서는  맛있게 해 주세요라고 한껏 소리친다   그 말을 하면 맛이 있게 되는 건지 나는 궁금했지만   맛있게 드세요, 아 이건  맛있게 먹으면 안 되겠네   왜 안 될까? 흰죽은 맛있는데  혹시 내가 맛있게 해 달라고 종용하지 않아서일까 그렇다면 너무나 이상한 일인데   맛의 정체를 모를 축축한 쌀알들이 내 안에서 마구 굴러다닌다 요즘은 어떠세요?   내가 아무리.. 2024. 9.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