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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93

■ 허연 시인의 시 ■ 칠월 & 내 사랑은 언제나 급류처럼 돌아온다고 했다 & 내가 원하는 천사 & 밤에 생긴 상처 & 슬픈 빙하시대 1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칠월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 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 놓은 깊은 골이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 버렸는지. 땅바닥을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 버린 잊은 그대가있었다     여름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 2024. 9. 20.
■ 이 원 시인의 시 ■ 쇼룸 & 아이에게 & 큐브 & 작고 낮은 테이블 & 사람은 탄생하라 사람과 사람// 어른과 아이//개와 사람개와 사람의 그림자가 섞이고  그림자는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쇼룸  사람과 사람    둘 나가고  둘 들어왔다   빈 곳을 메웠다   둘 들어오고  하나 나갔다   짚이는 대로  그림자 둘 집어 들고 갔다   문이 열리고  하나 들어갔다   하나 나오고  하나 들어갔다   발목들은 문 앞에 나란히  말라 죽은 화분 옆에 나란히   어른과 아이   집 밖에는 우산을 들고  장화를 신은 아이가 가고  거기는 허공이고  아이는 허공에서 앞발이 들렸고  우산이 앞을 다 가렸고   집 안에는 목이 꺾인 어른이 있고  팔짱을 껴서 베고 있고  창은 딱 맞고   개와 사람   개가 달리고 사람이 달린다  개와 사람이 달리고 길이 남는다  개와 사람이 달리고 눈이 펑펑 쏟아진다  .. 2024. 8. 25.
■ 김은지 시인의 시 ■ 여름 외투 & 반깁스 & 피나무가 열식된 산책로 & 아, 맞다 나 시 써야 해 & 그 영화는 좋았다 '실외기'의 이름을 풀어본다  바깥 기계  대체 어떻게 이렇게 섭섭하게 이름을 지을 수 있는지,  이처럼 특별하고 단정한 이름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하고여름 외투    낙타의 등 모양이라는 산에서  도시의 측면을 내려다보며  좁고 높은 건물의 옥상을,  올라가는 계단이 보이지 않는 옥상을  옥상이 아니라 하나의 뚜껑처럼 보일 때까지  응시했다   한 마을 하늘을 혼자 쓰는 새   광화문 전광판이 자그맣게 보이는 풍경이  게임보다 더 게임 같아    네온이 다시 유행이라고 하는데  형광이라는 말이 어딘가 촌스러운가 하면  네온사인이란 말은 더 오래된 말 같고  형광이란 단어도 시의 제목에 놓인다면 멋스럽지 않을까  뭘 쓸지 골몰하느라  단어들의 자리를 생각한 건 환승을 하면서였다   나를 놀이동산에 데려가.. 2024. 8. 20.
■ 이소연 시인의 시 ■ 대지의 상상력 & 단독주택에 사는 사람 & 장작 패는 사람 & 여름 옷장 & 해석의 갈등 대지의 상상력     대지는 두서없이 넓다 아니 누워 있다 평화로워 보인다  이쪽 나무는 서서 죽는데 저쪽 나무는 뿌리를 내린다  지독하고 오래된 가뭄이 시작되었다  대지의 상상력을 읽고 있었을 뿐인데   난데없이 나무들이 내 몸을 파고들었다  내 이름엔 물이 고여 흐른다고 했다  물을 빌리러 왔다고 했다  나는 간과 내장이 뭉그러졌고  대지도 아니면서 내 몸에 뿌리박은 것들이 꿈틀거리는것을 본다   나는 손가락이 베인지도 모르고 나뭇잎을 한쪽으로 밀어 넘긴다  발끝에 힘을 모으면 지평선이 잠시 흔들린다   머리만 남아 있는 나는, 나무에 껴 있는 어느 부처가 된다  아니면 나무 묘비를 세우고 있다   훗날 대지가 발견되는 걸까, 나무가 발굴되는 걸까  나무로 꽉 찬 기분으로 누워있다  불안의 책*이 된.. 2024. 8.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