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시인들95 ■ 서효인 시인의 시 ■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 가정집 & 그의 옆집 & 핍진성 명령을 기다리며 전쟁의 뒤를 두려워하는 당신은 사람이었다. 백 년이 지나 당신의 평화는 인간적으로, 계속될 것이다. 당신이 사람이라면.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평화는 전투적으로 지속되었다. 노르망디에서 시베리아를 지나 인천에 닿기까지, 당신은 얌전한 사람이었다. 검독수리가 보이면 아무 파티션에나 기어들어 둥글게 몸을 말았다. 포탄이 떨어지는 반동에 당신은 순한 사람이었다. 늘10분 정도 늦게 도착했고, 의무병은 가장 멀리에 있었다.지혈하는 법을 스스로 깨치며 적혈구의 생김처럼 당신은현명한 사람이었다. 전투는 강물처럼 이어진다. 통신병은터지지 않는 전화를 들고 울상이고, 기다리는 팩스는 오지않는다. 교각을 폭파하며 다리를 지나던 사람을 헤아리는당신은 정확한 사람이다. 굉음에 움츠러드는 사지를 애써달.. 2024. 5. 22. ■ 류근 시인의 시 ■ 어떻게든 이별 & 고달픈 이데올로기 & 명왕성 이후 & 1991년, 통속적인, 너무나 통속적인 & 박사로 가는 길 이별이다 아아, 어떻게든 이 별! 어떻게든 이별 어제 나는 많은 것들과 이별했다 작정하고 이별했다 맘먹고 이별했고 이를 악물고 이별했다 내가 이별하는 동안 빗방울은 구름의 자세와 이별했고 우산은 나의 신발장과 이별했고 사소한 외상값은 현금지급기와 이별했다 몇몇의 벌레들은 영영 목숨과 이별하기도 하였다 어제는 어제와 이별하였고 오늘은 또어제와 이별하였다 아무런 상처 없이 나는 오늘과또 오늘의 약속들과 마주쳤으나 또 아무런 상처 없이 그것들과 이별을 결심, 하였다 아아, 그럴 수 있을까 우리 동네 가난한 극장은 천장이 무너져 결국 문을 닫고 수리 중, 이다 로터리에서 사라질 것 같다 그것은 어쩌면 극장에서 극장이 이별당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옛날 애인은 결국초경 후 폐경하였다 이별이다 아아, .. 2024. 5. 20. ■ 김지녀 시인의 시 ■ 정착 & 쿠바에서 방배동으로 가는 버스 &누군가 내 창문을 다 먹어 버렸다 & 개미에 대한 예의 & 도그 워커 방금 기이한 새소리를 들었다새가 보이지 않아서음악과 같았다 정착 노트에 배 안에서 읽은 책의 제목을 적었다 이것이 기록의 전부다 노트는 열려 있고 한 달이 지났을 때의 일이다 이 섬이 나에겐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묘사하기가 어렵다 너무 단순하기 때문에 해안선이 복잡했다 이 섬으로 들어오는 일은 좋았다 내가 기억할 수 없는 시간을 간직한 좁고 비천한 골목을 내고 난파 직전의 배처럼 바다에 떠 있는 섬이 이미 있었다는 것이, 나를 일렁이게 했으므로 방금 기이한 새소리를 들었다 새가 보이지 않아서 음악과 같았다 한 달이 넘도록 책의 제목만 적힌 노트에 섬, 이라고 적었다 조금 일그러진 모양으로 섬이 커졌다 길어졌다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이 섬은 무한한 점들.. 2024. 5. 19. ■ 김언 시인의 시 ■ 백지에게 & 가족 & 나는 원했다 & 계속되는 마지막 비어 있다고 백지는 아니다. 백지로 차 있다고 해서 백지는 아니다. 백지는 백지답게 불쑥 튀어나온다. 백지였다는 생각을 잠시 잊게 만드는 백지 앞에서 백지를 쓴다. 백지에게 백지가 되려고 너를 만났다. 백지가 되어서 너를 만나고백지처럼 잊었다. 너를 잊으려고 백지답게 살았다. 백지가저기 있다. 백지는 여기도 있다. 백지는 어디에나 있는 백지. 그런 백지가 되자고 살고 있는 백지는 백지답게 할 말이 없다. 대체로 없소 한 번씩 있다. 백지가 있다. 백지에서 나오는 말들. 백지에서 나와 백지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말들. 도무지 백지가 될 수 없는 말들이 한마디로 그치지 않을 때 두 마디로도 그치지 않고 모자랄 때 모자란 만큼 잠식하는 백지의 운동은 백지를 갉아먹는다. 백지를 지워 나간다. 백지를 삭제.. 2024. 5. 19. 이전 1 ··· 12 13 14 15 16 17 18 ··· 2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