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시인들93 ■ 김지녀 시인의 시 ■ 정착 & 쿠바에서 방배동으로 가는 버스 &누군가 내 창문을 다 먹어 버렸다 & 개미에 대한 예의 & 도그 워커 방금 기이한 새소리를 들었다새가 보이지 않아서음악과 같았다 정착 노트에 배 안에서 읽은 책의 제목을 적었다 이것이 기록의 전부다 노트는 열려 있고 한 달이 지났을 때의 일이다 이 섬이 나에겐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묘사하기가 어렵다 너무 단순하기 때문에 해안선이 복잡했다 이 섬으로 들어오는 일은 좋았다 내가 기억할 수 없는 시간을 간직한 좁고 비천한 골목을 내고 난파 직전의 배처럼 바다에 떠 있는 섬이 이미 있었다는 것이, 나를 일렁이게 했으므로 방금 기이한 새소리를 들었다 새가 보이지 않아서 음악과 같았다 한 달이 넘도록 책의 제목만 적힌 노트에 섬, 이라고 적었다 조금 일그러진 모양으로 섬이 커졌다 길어졌다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이 섬은 무한한 점들.. 2024. 5. 19. ■ 김언 시인의 시 ■ 백지에게 & 가족 & 나는 원했다 & 계속되는 마지막 비어 있다고 백지는 아니다. 백지로 차 있다고 해서 백지는 아니다. 백지는 백지답게 불쑥 튀어나온다. 백지였다는 생각을 잠시 잊게 만드는 백지 앞에서 백지를 쓴다. 백지에게 백지가 되려고 너를 만났다. 백지가 되어서 너를 만나고백지처럼 잊었다. 너를 잊으려고 백지답게 살았다. 백지가저기 있다. 백지는 여기도 있다. 백지는 어디에나 있는 백지. 그런 백지가 되자고 살고 있는 백지는 백지답게 할 말이 없다. 대체로 없소 한 번씩 있다. 백지가 있다. 백지에서 나오는 말들. 백지에서 나와 백지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말들. 도무지 백지가 될 수 없는 말들이 한마디로 그치지 않을 때 두 마디로도 그치지 않고 모자랄 때 모자란 만큼 잠식하는 백지의 운동은 백지를 갉아먹는다. 백지를 지워 나간다. 백지를 삭제.. 2024. 5. 19. ■ 권박 시인의 시 ■ 공동체 & 방 & 마노코미오(manicomio) & 알코올 & 고백 공동체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무덤은 나를 꺼내려 하고개인의 자격으로 나는 무덤 같은 모자 안으로 들어가려하고 공동체 자살은 국가에 반역하는 과오라는 말을 부정하며 주카이에게 갔다.주카이는 내게 죽음처럼 생긴 모자를 건넸다.혼자 모자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나를 꺼내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죽고 싶어, 주카이, 나는 마술사의 모자처럼 모자라지않으면서 모자란 사람이니까. 사람들은 늘 내가 보는 앞에서 떠나가, 그때마다 이미죽은 생각은 무릎을 웅크리며 "그런데 무덤은 왜 공동체처럼 몰려 있는 거지?" 죽어서도 국가를 만드는 사람들로 인해 나는 잡초처럼뽑힌 기분이야, 주카이 공동체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무덤은 나를 꺼내려 하고 개인의 자격으로 나는 무덤 같은 모자 안으로 들어가려하고 정말 죽.. 2024. 5. 16. ■ 허수경 시인의 시■ 이국의 호텔 & 너무 일찍 온 저녁 & 내 손을 잡아줄래요? & 사진 속의 달 & 빙하기의 역 자연을 과거 시제로 노래하고당신을 미래 시제로 잠재우며 이곳까지 왔네 이국의 호텔에 방을 정하고 이국의 호텔 휘파람, 이 명랑한 악기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우리에게 날아온 철새들이 발명했다 이 발명품에는그닥 복잡한 사용법이 없다 다만 꼭 다문 입술로 꽃을 피우는 무화과나 당신 생의 어떤 시간 앞에서 울던 누군가를 생각하면 된다 호텔 건너편 발코니에는 빨래가 노을을 흠뻑 머금고 붉은 종잇장처럼 흔들리고 르누아르를 흉내낸그림 속에는 소녀가 발레복을 입고 백합처럼 죽어가는데 호텔 앞에는 병이 들고도 꽃을 피우는 장미가 서있으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장미에 든 병의 향기가 저녁 공기를 앓게 하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자연을 과거 시제로 노래하고 당신을 미래 시제로잠재우며 이곳.. 2024. 5. 14. 이전 1 ··· 12 13 14 15 16 17 18 ··· 2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