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142 ■ 박은정 시인의 시 2 ■ 작은 경이 & 아사코의 거짓말 & 링링 & 어떤 장례식 & 빙식증 작은 경이 너와 내가 공범이었다는 사실을 우리 빼고는 다 알았다 내가 훔친 운동화를 네가 신고 다닌다는 소문 훔친 운동화는 모르는 길도 처음 보는 가게도 거침없이 돌아다닌다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담배꽁초를 비벼 끄며 더위에 숨을 헐떡이는 개 시소 위에 놓인 돌멩이 하나 가끔은 모든 것이 전람회에 걸린 그림 같다 지루한 자신을 훔쳐 갈 도둑을 기다리듯 태풍의 전야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만으로 상상할 수 있는 일들은 많아진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 점성과 농도로만 이루어져 있을 때 세계에 가닿을 손끝을 예감했던 것처럼 손목과 발목이 서로 엉킨 채로 두려움이, 또 두려움 없는 마음이* 동시에 서로를 한 몸처럼 먹고 마시며 어떤 사랑은 사랑이 되기 위해 .. 2024. 10. 10. ■ 정다연 시인의 시 ■ 비밀 & 사실과 진실 & 빨래 & 밑줄 & 산책 누군가에게 비밀은 버려야 살 수 있는 거 누군가에게 비밀은 간직해야 살 수 있는 거비밀 이건 내 비밀이야 아무 사이도 아닌데 한 아이가 말했다 앞으로 영원히 마주칠 일 없다는 듯이 다행히 그 말을 하고 가는 아이의 표정은 한결 가벼워진 듯했는데 나는 끙끙 앓았다 그 비밀이 무거워서 한여름에 혼자서 물이 가득 찬 어항을 옮기는 것 같았다 새어 나가면 안 되는데 실수로 깨뜨리면 안 되는데 비밀 안에서 물고기들이 평화로워야 하는데 나 때문에 잘못될까 봐 껴안고 있었다 만약 그때 널 불러 세웠다면 어떻게 됐을까? 실은 나도 너와 같은 일을 겪었어 그런데도 살고 있어 말했다면 누군가에게 비밀은 버려야 살 수 있는 거 누군가에게 비밀은 간직해야 살 수 있.. 2024. 10. 8. 예이츠 W. B. Yeats, 『예이츠 서정시 전집 제3권 상상력』: 내전 시기의 명상들 편에서. 내전 시기의 명상들 Ⅰ조상 전래의 저택들 어느 부유한 사람의 잘 가꾼 언덕들의 나무들이 살랑거리는 한가운데의, 꽃 피는 잔디밭 사이에는 야심찬 고통 없이도 생명력이 넘쳐난다. 그리고 생명력은 푹푹 쏟아져 분수대에 넘치고, 쏟아지면 쏟아질수록 더 아슬아슬하게 솟구친다. 어떤 형태로든 제 마음대로 선택하고, 타인의 명령에 결코 기계적으로나 굴종된 모습으로 몸을 숙이지 않으려는 것처럼. 꿈일 뿐, 꿈이로다! 하지만 풍요롭게 번쩍이는 분출이 삶 자체의 희열에서 솟아나온다는 사실이 꿈보다 훨씬 더 확실하다는 걸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호메로스는 노래하지 않았으리라. 비록 지금은, 샘물이 아니라, 풍성한 조수의 미지의 암흑에서 튕겨 나온, 어떤 놀라운 속 빈 조개껍데기가 부유한 계층의.. 2024. 10. 6. ■ 남진우 시인의 시 ■ 나는 어둡고 적막한 집에 홀로 있었다. 사막을 가로질러온 바람이 허공에 모래먼지를 뿌리고 지나갔다. 이내 그가 적은 말들이 바람에 불려 쓸려나갔다 나는 어둡고 적막한 집에 홀로 있었다 나는 어둡고 적막한 집에 홀로 있었다. 아이는 방바닥에엎드린 채 산수 문제를 풀고 있었다. 복잡한 수식이 적힌 노트를 들여다보며 아이는 중력 암흑물질 벌레구멍 따위를 떠올리고 있었다. 나는 어둡고 적막한 집에 홀로 있었다. 소년은 침대에 누워 천장의 사방연속무늬를 헤아리고 있었다.소년의 머릿속 은하계 저편에서 죽어가는 별이 다른 우주로 건너가기 위해 마지막 빛을 내뿜고 있었다. 나는 어둡고적막한 집에 홀로 있었다. 청년은 욕실의 차가운 벽에 등을기대고 앉아 세면대에 한 방울씩 수돗물이 떨어지는 소리를듣고 있었다.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그는 언젠가 교수.. 2024. 10. 2. 이전 1 ··· 7 8 9 10 11 12 13 ··· 3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