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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명 시인의 시 ■ 뱀이 흐르는 하늘 & 단 한 사람 & 명자나무 & 우물쭈물 우물쭈물 & 희어서 좋은 외할머니 어느 몸에도 독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몸들이 잠깐잠깐 번쩍이는 건  역시 찬피가 숨어 빛을 쏘기 때문일까요  보석들의 근본인 차가움에 대해 생각이 미칩니다 뱀이 흐르는 하늘     하늘에는   아무도 물지 않고  뱀이 흐릅니다  흐르기 좋아하는 뱀이  길게 흐릅니다  숫자는 많지 않습니다  셋이군요  움직임 미세합니다  저토록 흰색이다가  엷은 황색을 띠기도 합니다  비치는 색지처럼 미묘히 몸 뒤집으며  그러다가 몸 풀듯 일직선을 이룹니다  발딱 일어선 일직선 말고  수평의 부드러운 일직선 말입니다  어느 몸에도 독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몸들이 잠깐잠깐 번쩍이는 건  역시 찬피가 숨어 빛을 쏘기 때문일까요  보석들의 근본인 차가움에 대해 생각이 미칩니다  그림 같습니다  뱀이.. 2024. 10. 1.
볼프강 보르헤르트 Wolfgang Borchert, 『가로등과 밤 그리고 별-함부르크 시집』에서: 가로등의 꿈, 함부르크에서, 잿빛 빨강 초록의 대도시 연가, 대도시, 골동품. 가로등의 꿈     나 죽으면  가로등이라도 되리.  그리하여,  너의 문 앞에서  창백한 저녁을 환히 비추리.   아니면 항구에서,  커다란 증기선들이 잠자고  아가씨들이 웃는  그곳에서 불침번 서며,  비좁고 더러운 운하 곁  홀로 걷는 이에게 깜빡이리.   좁은 골목  어느 선술집 앞에서  빨간 양철등으로 매달려,  상념에 잠기고  밤바람에 흔들리며  그네들의 노래가 되리.   아니면, 창틈으로  바람은 비명을 지르고  바깥 꿈들이 유령을 토해낼 때,  혼자 남은 걸 알고 놀라  휘둥그레진 아이의 눈망울에 번지는  등불이 되리.   그래, 나 죽으면  가로등이라도 되리.  그리하여,  모두가 잠든 세상에서  밤마다 홀로 저 달과  이야기를 나누리.  아주 사이좋게.    함부르크에서     함부르크.. 2024. 9. 30.
보들레르 Charles Baudelaire, 『악의 꽃』에서: 알바트로스 & 시지나 & 우울 & 백조 & 거짓에의 사랑. 알바트로스*     흔히 뱃사람들이 재미 삼아  거대한 바닷새 알바트로스를 잡는다,  이 한가한 항해의 길동무는  깊은 바다 위를 미끄러져 가는 배를 따라간다.   갑판 위에 일단 잡아놓기만 하면, **  이 창공의 왕자도 서툴고 수줍어  가엽게도 그 크고 흰 날개를  노처럼 옆구리에 질질 끄는구나.   날개 달린 이 나그네, 얼마나 서툴고 기가 죽었는가!  좀전만 해도 그렇게 멋있었던 것이, 어이 저리 우습고 흉한 꼴인가!  어떤 사람은 파이프로 부리를 건드려 약올리고,  어떤 사람은 절름절름 전에 하늘을 날던 병신을 흉내낸다!   「시인」도 이 구름의 왕자를 닮아***  폭풍 속을 넘나들고 사수를 비웃건만,  땅 위, 야유 속에 내몰리니, ****  그 거창한 날개도 걷는 데 방해가 될 뿐.    *.. 2024. 9. 28.
■ 박참새 시인의 시 ■ 무해한그릇-물 마시는 시 & 말하는 자에게 내려지는 벌이 있는 것일까 & 우리 이제 이런 짓은 그만해야지 & 정신머리 무해한그릇- 물 마시는 시     습기: 모든 질병의 원인*   멋지네  안타깝고   조금만 더 일찍 태어날걸  태초에 물이 있었던 거네   찰랑찰랑  걸음걸음마다 내 안에서 물이 아스르르  넘칠 것만 같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발자국이 촉촉했다   흰죽 한 그릇 주세요  아픈 사람처럼 말한다 죽은 아픈 밥이니까   너머 테이블에서는  맛있게 해 주세요라고 한껏 소리친다   그 말을 하면 맛이 있게 되는 건지 나는 궁금했지만   맛있게 드세요, 아 이건  맛있게 먹으면 안 되겠네   왜 안 될까? 흰죽은 맛있는데  혹시 내가 맛있게 해 달라고 종용하지 않아서일까 그렇다면 너무나 이상한 일인데   맛의 정체를 모를 축축한 쌀알들이 내 안에서 마구 굴러다닌다 요즘은 어떠세요?   내가 아무리.. 2024. 9.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