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142 ■ 김은지 시인의 시 ■ 여름 외투 & 반깁스 & 피나무가 열식된 산책로 & 아, 맞다 나 시 써야 해 & 그 영화는 좋았다 '실외기'의 이름을 풀어본다 바깥 기계 대체 어떻게 이렇게 섭섭하게 이름을 지을 수 있는지, 이처럼 특별하고 단정한 이름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하고여름 외투 낙타의 등 모양이라는 산에서 도시의 측면을 내려다보며 좁고 높은 건물의 옥상을, 올라가는 계단이 보이지 않는 옥상을 옥상이 아니라 하나의 뚜껑처럼 보일 때까지 응시했다 한 마을 하늘을 혼자 쓰는 새 광화문 전광판이 자그맣게 보이는 풍경이 게임보다 더 게임 같아 네온이 다시 유행이라고 하는데 형광이라는 말이 어딘가 촌스러운가 하면 네온사인이란 말은 더 오래된 말 같고 형광이란 단어도 시의 제목에 놓인다면 멋스럽지 않을까 뭘 쓸지 골몰하느라 단어들의 자리를 생각한 건 환승을 하면서였다 나를 놀이동산에 데려가.. 2024. 8. 20. ■ 이소연 시인의 시 ■ 대지의 상상력 & 단독주택에 사는 사람 & 장작 패는 사람 & 여름 옷장 & 해석의 갈등 대지의 상상력 대지는 두서없이 넓다 아니 누워 있다 평화로워 보인다 이쪽 나무는 서서 죽는데 저쪽 나무는 뿌리를 내린다 지독하고 오래된 가뭄이 시작되었다 대지의 상상력을 읽고 있었을 뿐인데 난데없이 나무들이 내 몸을 파고들었다 내 이름엔 물이 고여 흐른다고 했다 물을 빌리러 왔다고 했다 나는 간과 내장이 뭉그러졌고 대지도 아니면서 내 몸에 뿌리박은 것들이 꿈틀거리는것을 본다 나는 손가락이 베인지도 모르고 나뭇잎을 한쪽으로 밀어 넘긴다 발끝에 힘을 모으면 지평선이 잠시 흔들린다 머리만 남아 있는 나는, 나무에 껴 있는 어느 부처가 된다 아니면 나무 묘비를 세우고 있다 훗날 대지가 발견되는 걸까, 나무가 발굴되는 걸까 나무로 꽉 찬 기분으로 누워있다 불안의 책*이 된.. 2024. 8. 17. ◆ 박상순 시인의 심사평 ◆ 의식의 눈을 찌르는, 빛나는 언어, 발견되는 언어(제67회 현대문학상 본심 심사평) 의식의 눈을 찌르는, 빛나는 언어, 발견되는 언어-박상순 이제니의 시는 현실 대상의 표면에서 의식의 표면으로 나아간다. 이런 표면성 전환은 그녀의 시 「빛나는 얼굴로 사라지기」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 대로 바라보지 않는 오늘의 눈”이나 “마지막으로 남은 명사 하나를 밝혀내기 위해 써 내려가고 있다” 등의 표현을 통해 지각과 언어의 구조로 이루어진다. 다소 시간을 지체시키는 반복적 어휘들이 감정적인 노선으로 빠져들게 하는 듯하지만 결국 그것들의 반복 구조를 통해 한편으로는 일정한 질서를 회복하며 절망적인 도착 지점에 이른다. 그 지점은 바로 감정적인 분위기, 무드 Mood의 절망이거나 절연 지점이다. 산문 형식의 글쓰기, 냉정하게 말하자면 잡문雜文의 형식을 취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이제니의 시는 .. 2024. 8. 16. ■ 이병일 시인의 시 ■ 녹명(鹿鳴) & 마야꼽스끼의 방 & 골리앗 크레인의 도시 & 정원사 일기 & 오후 두시의 파밭 녹명(鹿鳴) 저 흰빛의 아름다움에 눈멀지 않고 입술이 터지지 않는 나는 눈밭을 무릎으로 밟고 무릎으로 넘어서는 마랄사슴이야 결코 죽지 않는 나는 발목이 닿지 않는 눈밭을 생각하는 중이야 그러나 뱃구레의 갈비뼈들이 봄기운을 못 견디고 화해질 때 추위가 데리고 가지 못한 털가죽과 누런 이빨이 갈리는 중이야 그때 땅거죽을 무심하게 뚫고 나오는 선(蘚)들이 거무튀튀한 사타구니를 몰래 들여다보는, 그런 온순한 밤이야 바닥을 친 목마름이 나를 산모롱이 쪽으로 몰아나갈 때 홀연히 드러난 풀밭은 한번쯤 와봤던 극지(劇地)였던 거야 나는 그곳에서 까마득한 발자국의 거리만큼 회복하고 싶어 무한한 초록빛에 젖은 나는 봄눈 내리는 저녁을 흘려보내듯이 봄눈 바깥으로 흘러넘치는 붉은.. 2024. 8. 15. 이전 1 ··· 11 12 13 14 15 16 17 ··· 3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