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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시인의 시 ■ 나의 도시 & 비행장을 떠나면서 & 슬픔의 난민 &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나의 도시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서울 사천 함양 뉴올리언스 사이공 파리 베를린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우울한 가수들 시엔엔 거꾸로 돌리며돌아와, 내 군대여, 물에 잠긴 내 도시 구해달라고 울고   그러나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마치 남경 동경 바빌론 아수르알렉산드리아처럼 울고  도서관에서는 물에 잠긴 책들 침묵하고 전신주에서는 이런 삶이끝날 것처럼 전기를 송신하던 철마도 이쑤시개처럼 젖어 울고   나의 도시 안에서 가엾은 미래를 건설하던 시인들 울고 그 안에서  직접 간접으로 도시를 사랑했던 무용수들도 울고 울고 울고   젖은 도시 찬란한 국밥의 사랑  쓰레기도 흑빛이었다가 흰빛이었다가 보랏빛 구릿빛 빛 아닌살갗이었다가  랩도 블루스도 기타도 현도 방망이도 철판도 짐승의 가죽으로소리 내던.. 2024. 7. 28.
마르셀 프루스트 Marcel Proust, 『시간의 빛깔을 한 몽상』에서: 튈르리 공원 & 베르사유 궁전 & 여인들의 문예 취미 & 마음속에서 지는 태양 튈르리 공원    오늘 아침 튈르리 공원의 태양은 잠이 덜 깬 듯 돌계단위를 한 칸씩 미끄러지며 내려가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태양의 그림자는 선잠에 빠진 금발 청년을 금방이라도깨울 것만 같았다. 오래된 궁전을 배경으로 어린 새싹들이푸르러져 간다. 무엇엔가 홀린 바람의 숨결은 과거의 냄새에라일락의 신선한 향기를 섞는다. 미친 여자의 갑작스러운등장처럼 흔히 우리를 겁주던 석상들은 이곳 소사나무 아치아래에 꿈을 꾸듯 서 있다. 녹음 속에서 흰 빛으로 눈부신그 모습이 마치 현자들 같구나. 파란 하늘이 내려앉은수반은 흡사 사람의 시선인 양 빛난다.   강가의 테라스 너머로 센강 저편 케 도르세*의 고색창연한 동네에서 과거로 돌아간 듯 근위병 하나가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제라늄 화분들 위로 들꽃들이흐드러지게 침범.. 2024. 7. 21.
■ 김소연 시인의 시 ■ 흩어져 있던 사람들 & 촉진하는 밤 & 그렇습니다 & 문워크 & 식량을 거래하기에 앞서 근데 말벌은 어디 있지?   뿔뿔이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벌집을 에워싸며   처음으로 가까이 모여들었다 흩어져 있던 사람들    선생님 댁 벽난로 앞에서 나는 나무 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누군가 사과를 깎았고 누군가   허리를 구부려 콘솔 위의 도자기를 자세히 보았다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무 타는 소리가   빗소리에 묻혀갔다 누군가 창 앞으로 다가가   뒷짐을 지고 비를 올려다보았고 누군가   그 옆으로 다가갔다   뭘 보는 거야?   비 오는 걸 보는 거야?   선생님 댁 벽난로에서 장작 하나가 맥없이 내려앉았다   다 같이 빗소리 좀 듣자며 누군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때 말벌 한 마리가 실내로 날아들었다   누군가 저것을 잡아야 한다도 소리쳤지만 모두가   일제히 어깨를 움츠렸다 .. 2024. 7. 18.
■ 황유원 시인의 시 ■ 초자연적 3D 프린팅 좀더 큰 집이 필요하다 그 안에 온 우주를 가둘 수 있는,  초자연적 3D 프린팅    좀더 큰 집이 필요하다 그 안에 온 우주를 가둘 수 있는,    그러나 우주도 결국 하나의 집이다  집 우(宇) 집 주(宙) 넓을 홍(洪) 거칠 황(荒) ······ 평수가 좀더 될 뿐   우리가 또 여기서 어디로 갈 수 있겠어? 가도 가도 여기이곳뿐인데   그래도 지금보다도 훨씬 큰 집이 필요하다  그건 크기만의 문제는 아니어서 한순간의 진동일 수도 있거 물에서 빠져나와 들이쉬는 단 한 번의 숨일 수도 있지만   여하튼 그 안에 모든 발광과 기쁨과 통곡과 신경쇠약을가둘 수 있는  눈물과 눈물 없인 못 들어줄 그 모든 노래를 넘나들 수 있고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마음껏 건너뛰며 놀 수 있는, 장대높이뛰기 .. 2024. 7.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