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142

■ 황유원 시인 ■ 2023 제68회 현대문학상 수상작 「하얀 사슴 연못」 외 6편. 하얀 사슴 연못    백록담이라는 말에는 하얀  사슴이 살고 있다   이곳의 사슴 다 잡아들여도 매해 연말이면 하늘에서 사슴이  눈처럼 내려와 이듬해 다시  번성하곤 했다는데   이제 하얀 사슴은 백록담이라는 말  속에만 살고  벌써 백 년째 이곳은 지용의 『백록담』 표지에서  사슴 모두 뛰쳐나가고 남은  빈자리 같아   그래도 이곳의 옛 선인들이 백록으로 담근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백록은 어쩌면 동물이 아니라  기운에 가깝고  뛰어다니기보다는 바람을 타고 퍼지는 것에 가까워  백록담, 이라고 발음할 때마다  『백록담』 표지 밖에서 표지 안으로  돌아오는 것도 같고   하얀 사슴 몇 마리가 백록담 위를 찬바람처럼 달려가고 있을거라는 생각만으로도 머릿속은  청량해진다  연못에 잠시 생각의.. 2024. 7. 10.
■ 길상호 시인의 시 ■ 우리의 죄는 야옹 & 가디마이 & 잠잠 & 그림자 사업 & 빗방울 사진. 남몰래 길러온 발톱을 꺼내놓고서  부드럽게 닳을 때까지  물벽에 각자의 기도문을 새겼네우리의 죄는 야옹    아침 창유리가 흐려지고  빗방울의 방이 하나둘 지어졌네  나는 세 마리 고양이를 데리고  오늘의 울음을 연습하다가  가장 착해보이는 빗방울 속으로 들어가 앉았네  남몰래 길러온 발톱을 꺼내놓고서  부드럽게 닳을 때까지  물벽에 각자의 기도문을 새겼네  들키고야 말 일을 미리 들킨 것처럼  페이지가 줄지 않는 고백을 했네  죄의 목록이 늘어갈수록  물의 방은 조금씩 무거워져  흘러내리기 전에 또 다른 빗방울을 열어야 했네  서로를 할퀴며 꼬리를 부풀리던 날들,  아직 덜 아문 상처가 아린데  물의 혓바닥이 한 번씩 핥고 가면  구름 낀 눈빛은 조금씩 맑아졌네  마지막 빗방울까지 흘려보내고 나서야  .. 2024. 7. 8.
찰스 부코스키 Charles Bukowski 시집, 『창작 수업』에서: 연예 산업 & 암흑과 얼음 & 작은 카페 & IBM 앞에 앉아서 & 내 친구 부처님. 연예 산업    그쪽은 나도 역부족  당신도 역부족  우리에겐  어림없는 일   그러니 그쪽으론 기웃대지 말아요  아예 꿈도 꾸지  말아요   그저 아침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스스로   씻고  면도하고  옷 입고  밖으로 나가  뛰어들 뿐   그 외에  남은 거라돈  자살과  광란 뿐이오   그러니  지나친 기대는  금물   기대는 싹  접으시라   그러니  해야 할 일은  최소한의   기본적  행위   가령 집 밖에  나갔을 때  차가 그 자리에  있으면  기뻐하기   그대로 있는 데다  타이어도 펑크가 나지  않은 걸  기뻐하기   그렇다면 차에  올라타  시동이   걸리면  출발   이제부터  일생일대의  개똥 같은   영화가  상영되고  당신은  그 영화의  출연자   저예산  게다가  평.. 2024. 7. 7.
『현대시』 7월호에서 눈에 띈 시: 「돌 앞으로」, 「이민 가방을 싸며」(정영효), 「선생의 항아리」(김기형), 「거대 사랑 시」(윤혜지), 「나무를 사랑하는 법」 (강영은), 「들과 창고 사이에서」 외 4편(박세미). 『현대시』 7월호 목차:   돌 앞으로 정영효     더 많은 땅을 갖고 싶어서 나는 돌밭을 가꾸었다   버려진 땅으로 일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돌을 가려내고 계속 돌을 치우면서   돌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것, 드러나도 새로움이 없는 것, 한쪽에버려두면 그냥 무더기가 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어느새 높게 쌓인 돌 앞에서 이웃들은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부르기쉬운 이름을 붙여주며 하나의 장소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전보다 많은 땅을 가지게 되었고 더 이상 가려낼 돌을 찾지 못했다 쌓인 돌의 주인은 내가 아니었으므로   땅이 줄 내일을 상상했다 작물을 심고 빛이 내리쬐는 계절을 기다리는 동안   이웃들은 여전히 돌 앞으로 모였는데 땅에서는 무엇도 자라지 않았는데 지금을 밀어내는 소식처럼   .. 2024. 7.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