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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93

■ 조혜은 시인의 시 ■ 눈 내리는 체육관 연작 여기서 무엇이 방어 자세인지 알아챌 수 있겠니? 눈 내리는 체육관  - 사라진 유치원     유치원이 사라진 자리에는   지하로 내려앉은 체육관뿐이었다.   -창문이 있어.  너와 나는 마법에 걸렸다.  창밖으로 뜨거운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알고 있어.  나는 예고된 카운터를 날릴 때에도 머뭇거리던 사람.  -알고 있어?  글러브를 단단히 조이며 네가 말했다.  -이것도 연습이야.  그녀의 비극적인 삶이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떨어져 내렸다.  -무기력도 연습이지.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흔들린 자세 위로 또다시.   아이들이 보이지 않자 울음도 없어졌다.  지운 걸까 사라진 걸까.  지웠다면 무엇을,  사라졌다면 어떻게,   여전히  왼쪽과 오른쪽을 혼동하며.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가.. 2024. 4. 25.
■ 나희덕 시인의 시 ■ 그날 이후, 거대한 빵, 유령들처럼, 토리노의 말, 가능주의자 문의 공포는열 수 없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잠글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날 이후     출입문의 손잡이가 있던 자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손잡이가 사라졌으니  문은 그대로 벽이 된 것인가   구멍으로 스윽 밀고 들어온 주먹 하나가  내 손목을 거칠게 잡아챘다   어디론가 끌려갔다 돌아와 보니  문이 활짝 열려 있다   타인의 시선들로 가득찬 방,  책상과 의자와 침대가 수치심에 떨고 있다   이제 이곳은 내 방이 아니다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지만  출구는 없는 방   문의 공포는  열 수 없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잠글 수 없다는 데 있다   시선의 블랙홀 속에서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이 서성거리는 동안   또 어떤 손이 저 구멍으로 밀고 들어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지.. 2024. 4. 22.
■ 양안다 시인의 시 ■ 천사를 거부하는 우울한 연인에게, 잔디와 청보리의 세계, 탄포포 그리고 시인의 말 당신은 내가 외면한 슬픔의 총체인 걸까. 우리는 아름다운 종류의 괴물을 천사라고 부르기로 합의했는데. 우리가 영원히 깨어날 수 없다는 말에 동의해줘.  천사를 거부하는 우울한 연인에게     내가 내 문제를 끝낼 수 있게 도와줘.   우리는 혼절한 단어를 너무 많이 받아 적었잖아.  우리는 해롭고 틀린 방식으로 기절합니다. 새벽이면 우리의 방에 청색 리듬이 필요합니다. 등불이 밤새도록 헤엄치고, 목구멍은 가끔 악기가 되어서, 슬픔에 잠긴 돌, 이름을 붙여줄까요? 중력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무너지는 집을 떠나야죠. 척추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유연함은 우리의 전공입니다. 그래요. 새벽에 적응하지 못한 짐승이 졸도하는 시간이에요. 어두운 숲에서 눈뜨고 잠든 건 나무가 아니라   우리였습니까?   짐승이 되는.. 2024. 4. 21.
■ 김리윤 시인의 시 ■ 재세계reworlding, 이야기를 깨뜨리기, 영원에서 나가기, 글라스 하우스, 모든 사람 같은 빛 그 사람은 영원히 아무것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모든 것을 영원히 잊게 될 것이다  재세계 reworlding     지나간 일은 다 잊자  지나간 일은 다 잊는 거야   그는 이 대사의 다음 장면에서 죽었다  영화 속에서 영화는 계속될 것 같았고  그 사람은 영원히 아무것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모든 것을 영원히 잊게 될 것이다   휴대폰 불빛이 신경 쓰여서 도무지 영화에 집중할 수없었어  극장에 꽉 들어찬 어둠은 그 작은 불빛 하나 숨겨주지못하고  주인공은 12월 밤거리의 쏟아지는 불빛 때문에 맞은 편에서 다가오는 것도 알아보지 못한다   오래된 거리를 걸으면 가로수들은 영원히 자랄 것 같다 정원사의 손에서 떨어지는 잎사귀와 뚝뚝 분질러지는나뭇가지의 미래를, 잔디가 깎이는 동안 우수수 떨어지는 머.. 2024. 4.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