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시인들93 ■ 김 현 시인의 시 ■ 혼자서 끝없이, 터치 마이 보디, 시원시원한 여자, 궁지 이모, 슬픔이 많으면 개가 되는 거야 석희가 기쁨의 뼈다귀를 멀리 던졌습니다 금희가 맨발로 뛰어갔지요 혼자서 끝없이 현이야 내 슬픔도 가져가 지난밤 저승으로 가는 길목에서 금희는 속삭이었어요 저승까지 가는 마당에 슬픔도 묻어야지 금희가 짚신을 벗어서 한 손에 들었습니다 얼마나 더 가야 할까 금희가 석희에게 물었습니다 석희는 네 살배기 조카 지난밤 금희의 꿈에 따라 들어와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요 유창하게 의사를 전달하였습니다 이모, 연우가 그러는데 한민족은 아름답대 연우가 남북 겨레의 가슴에 대고 물어봤대 울창하더래 소나무 숲이 푸르더래 사돈에 팔촌도 다 상록수림 금희는 왈왈 짖었습니다 이모, 슬픔이 많으면 개가 되는 거야 석희가 기쁨의 뼈다귀를 멀리 던졌습니다 금희가 맨발로 뛰어갔지요 현이.. 2024. 4. 20. ■ 김복희 시인의 시 ■ 밤의 기계 & 거울 & 사랑 & 씌기 & 천사의 선물 & 용서는 가장 작은 돌 밤의 기계 세상 것들이 서로 두려워하지 않도록 나는 떠올린 모든 것에게 그림자를 만들어주었다 많이 알 지 못해 입력하지 않은 것들이 그림자 없이 살 줄은 몰랐다 모두를 위해 밤을 준비했다 그늘을 준비했다 작은 소리들을 달아주었다 꼭 나는 조용한 것들에게 매료된다 내 귀로는 못 듣는 소리들 너희 거기 없지 못 들으면서 있다고는 아는 그림자가 없다는 이유로 정드는 신은 조금 미쳐 있지만 그래서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나는 정신을 차린다 그들 가까이 멀리 걸어 빛 속으로 사라진다 신이 그들을 따라다닌다 미치지 않고서야 사람을 저렇게 따라다닐 리 없다 거울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는 사람이라면 좋을 텐데 밤에 사냥하고 낮에 자는 맹수라면 좋을 .. 2024. 4. 19. ■ 박은정 시인의 시 ■ 밤과 꿈의 뉘앙스 & 한 뼘의 경희 & 산책 & 까마귀를 훔친 아이 & 302호 어젯밤엔 술잔을 던졌고 내일 밤은 보들레르의 시를 읊으며 단골 바에서 울고 있을 예정이야 한 뼘의 경희 개의 그림자는 한낮 죽은 나무들은 이름이 없다 세상의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매주 종로에 모였다 서툴게 인사를 나누며 출렁이던 사람들 틈에서 어깨를 움츠린 경희를 만났다 150센티미터도 안 되는 한 뼘의 경희 너는 영화를 좋아했고 롱부츠를 자주 신었고 붉은 입술이 온기로 부풀던 아이 덜 아문 상처를 서로 할퀴며 그럴 때마다 눈물이 솟아나는 게 신기해 훔치던 두 손을 모른 척하던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면 무릎을 껴안고 숨어 있는 게 안전해 어젯밤엔 술잔을 던졌고 내일 밤은 보들레르의 시를 읊으며 단골 바에서 울고 있을 예정이야 우리에겐 애인.. 2024. 4. 18. ■ 윤은성 시인의 시 ■ 계약 & 주소를 쥐고 & 원탁 투명 & 공원의 전개 & 선셋 롤러코스터 켄트 씨는 그런 춥고 느린 장면들이함박눈이 내리는 길고 긴 오후의 인상처럼기억에 남을 것이라 생각되고 있었다. 계약 트렁크를 끌고서 켄트 씨가 걸어간다. 그녀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의심한 적은 없었다. 연락이 가끔 더뎠고 계좌에 잔액이 줄었다. 일을 구하는 것이 늦어지고 있었다. 유리문 밖에는 소년들이 담배를 피우다 돌길을 걸어 사라지고 있었다. 켄트 씨는 그런 춥고 느린 장면들이 함박눈이 내리는 길고 긴 오후의 인상처럼 기억에 남을 것이라 생각되고 있었다. 천천히 낙하하는 눈을 좋아하는 켄트 씨는 자신의 트렁크 안에 비가 내린다고 했다. 열면 멈추지 않고 우는 신들의 얼굴이 보인다고 했다. 그러한 신들 역시 끌어안을 것을 모두 놓친 것이 아닐.. 2024. 4. 16. 이전 1 ··· 18 19 20 21 22 23 24 다음